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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쟁이 Dec 31. 2023

동심으로 돌아간 하루

눈이 펑펑 오랜만에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이 아름답다.  습설이 쌓인 눈길은 미끄럽기도 하지만 밟을 때면 폭신폭신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다.

어린아이를 둔 가족들은 썰매를 가지고 나와 내리막길에서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하얀 눈길을 걸어보려고 완전무장을 하고 나섰다.


걷다 보니 여기저기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습기를 머금은 눈이 잘 뭉쳐져서 그런가 보다.

지나치는 눈 속에 눈길이 한번 더 머문다.

그러다 갑자기 나도 눈사람을 만들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동그랗게 눈을 뭉치고 굴려보니

눈이 금세 눈덩이가 되어 뭉쳐졌다.

내가 느닷없이 눈덩이를 만드니 남편도 따라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엄마 아빠가 왜 느닷없이

어린아이처럼 눈덩이를 굴리는 게 이상했는지 자꾸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굴리던 눈덩이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얼굴로 만들 눈덩이를 남편은 몸통을 굴렸다.

커다란 내 눈덩이가 2층탑처럼 올라갔다.

무게 때문에 몸통 눈덩이가 찌그러져 다시 빈 구석을 메웠다.


이제 몸통과 얼굴을 매끄럽게 만들고 눈사람을 장식해야 했다. 하지만 쁘게 만들 장식도구가 없었다. 남편은 떨어진 단풍잎을 몇 개 가져오고

나는 느닷없이 귀를 만들었다.

그리고 울라프같이 코를 뾰족하게 나오게 붙였다.

흰 바탕에 하얀 눈, , 귀를 만드니 눈사람이 특징이 없었다.

고민하다 입을 길게 웃음모양으로 만들고

단추를 넣었다. 남편이 팔을 긴 나뭇가지로 붙이기에 나는 단풍잎으로 눈과 코를 만들었다.


사실 눈사람은 돼지 같기도 울라프 같기도 토끼 같기도 했지만 보면 환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귀여움을 지닌 눈사람으로 탄생했다.


아직은 미완성인 눈사람


그 알 수 없는 정체에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 앉아 눈을 털고 있을 때  지나치던 노부부가 웃으며

눈사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편 한 장 부인 한 장. 그래서 나는 얼른 다가가

노부부의 투샷을 찍어 드렸다.

뒤에 지나가던 부부도 오더니 웃으며 나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며  눈사람과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나는 마치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킨 듯

두 번째 부부에게도 사진을 찍어드렸다.


오! 우리 작품이 갑자기 핫 스폿이 됐어

으하하!!!!

남편과 나는 내심 기뻤고 시큰둥했던 딸도

뭔가 더 훌륭한 작품을 위해 거들기 시작했다.


우린 눈을 더 매끈하게 다듬고

귀를 방울방울 올렸다. 넥타이를 붙이고 팔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멀리서 지나치던 사람들의 눈길이 한번 더 머물며

웃음을 짓게 했다.


귀여움을 한껏 뽐낸 눈사람

그리고 곧이어 지나가던 젊은 부부도 눈사람과

한 컷씩 사진을 찍고 갔다.

갑자기 눈사람 핫 스폿이 되고 우린 눈사람을 만든

작가가 된 듯해 흐뭇했다.


사람들은 별 것 아닌 것에  미소를 짓고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어쩌면 마음 안에 숨겨진 동심을

꽁꽁 숨겨놓고 살다가 불쑥불쑥 꺼내지는 마음을

보고 반가운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남편도 50이 넘은 나이에 숨겨진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눈사람을 만들 때도 눈사람을 장식할 때도

우린 10살의 나이로 돌아간 듯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50의 나이엔 누군가를 잠시 웃음 짓게 만드는 눈사람 작가가 된 듯해

많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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