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을 걷는 게 언제부터 버킷리스트에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대학생 때 국토대장정을 꿈꾸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원래도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언제나 목적지가 정해진 걷기를 좋아했다. 하염없이 걷는 거? 목적지 없이 발 가는대로 걷는 거?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길 등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는 걸 좋아했다. 1시간? 2시간?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는 상관 없었다. 게임도 자유도가 너무 높은 걸 좋아하지 않고, 영화도 드라마도 너무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 반영된 걸지도 모르겠고, 그냥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는 것만 자신 있는 사람이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냥 매일 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걸으라고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국토대장정을 '못'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 대신 대학 시절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였던 '엄마, 아빠의 경제적 도움 없이 살아보기'를 위해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고, 인생 최고의 1년을 보냈다. 생각보다 높았던 시급 덕분에 유럽 여행이라는 버킷리스트는 덤으로 이룰 수 있었다. 지나온 대학 시절, 후회하는 결정은 단 하나도 없다. 그래도 계속 아쉬웠는지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성인 대상, 일반부 국토대장정을 찾아보곤 했다. 하지만 타고난 일복이 많은지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아르바이트 마저 쉰 적이 없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시작한 일을 10년 동안 쉬지 않고 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2026년 2월은 내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달이다. 매년 연초는 프리랜서인 나에게 언제나 불안한 시기인데, 대부분의 일이 3월 이후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왜 일이 없을까 하는 걱정으로 시작해서 이거보다 일을 더 할 수는 없겠다, 내년에는 쉬어야겠다로 끝내는 게 매년의 루틴이었다. 이 과정에서 매년 1월 '올해는 순례길을 가야지'라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사라졌다. 그리고 2026년 1월 역시 똑같아 보였다. 늘 그렇듯 '올해도 일이 없으면 가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미 시작한 프로젝트가 4월에 끝이 나는 상황이었다. 4월 이후에도 일을 하게 될 확률은 높지만, 올해만큼은 내가 정하고 싶었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1년이 아니라, 한 달 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듯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2026 순례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혼자 갈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런데 나보다 한 달 먼저 프로젝트를 마치는 나의 사회생활 첫 후배가 한 달을 쉬고 나와 함께 순례길을 가겠다고 전해왔다. 프리랜서에게 한 달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쉽게 제안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순례길을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랑 같이 갈 기회가 생겼으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예요?' 그래, 이제 나도 그렇게 됐다. 나도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랑 같이 갈 기회가 생겼으니 무조건 가야겠다. 그렇게 우리는 인천에서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순례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10년을 넘어, 15년을 바라보지만 순례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비행기표를 끊는 일뿐이었다. 순례길을 가는 방법은 순례길을 가는 거다. 내가 너무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동을 미뤄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근데 비행기표 끊으면 진짜 순례길 근처까지만 갈 수 있는 거였네...
2026 순례길 프로젝트 준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