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일 글쓰기 (036/100)
(예전 블로그의 이름을 지었을 때 쓴 글에 지금의 생각을 더해 고쳐 썼습니다.)
(이십대 중반의 생각인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절망적이군요)
블로그를 리뉴얼했고, 속물이라고 닉네임을 지었다. 계기는 그간의 크고 작은 경험이 축적된 하나의 기준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며 언젠가 멍청이와 개새끼 프레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건 새똥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된 하나의 가설이지만, 최근의 나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향점을 찾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격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이기적인 자신과 그 여집합 사이에서 자기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하는 때가 인간에게 반드시 찾아온다는 의미다. 여기서 인간은 정치, 사회적 활동을 영위하는 자들로 한정한다. 즉, 현대 사회에서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살아가는 사람들,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를 보면, 사람들은 자기의 안위를 위하여 본인이 믿는 가치를 따르는 결정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 가치를 위해 자기 안위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정치,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것은, 그 집단이 곧 자신의 행위와 그에 관련된 사회의 이슈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린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이데아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도 가정한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이 가설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작게는 정의라는 가치와 학점이라는 자기 안위 사이에서 부정행위(Cheating)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에드워드 스노든처럼 내부고발을 하는 문제까지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에드워드 스노든의 경우 자기표현의 욕구와 같은 자기만족, 위안적 요소를 따랐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시의성이 적절하여 예로 들었지만, 이 사례가 적절치 않다면 4대강 문제에 대해 양심선언을 한 연구원 등 한국의 사례를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그 의도와 별개로 실질적인 결과만 놓고 보면 '멍청이' '개새끼'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은 맞지 않나.
여기서 이 프레임(Frame)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특정한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이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종종 숭배한다. 사실, 이 프레임은 고전적 딜레마와 연관이 있는 문제이기에 신화 속 영웅에게 주어진 난제와 유사한 양상을 띤다. 솔로몬 왕에게 주어진 판결의 문제와 같이, 일반인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이라고 본다. 때문에, 이들 역시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하여 내 사고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개인들 역시 개별 사건에서는 프레임을 뛰어넘고 부술 수 있지만, 신화적 서사에서조차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닌 존재는 종국에는 유사한, 그러나 다른 가치 판단의 프레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자멸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건의 가치 판단에 있어서 프레임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이 프레임을 아직까지 실재하는 무언가라고 가정한다면 나 역시 이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 들어가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혹자는 상자 밖에서의 사고(Think outside the box)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메타 시스템의 인식을 통한 세계관 확장과 관련된 내용이고,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서 나와 같은 한낱 일반인은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창업을 시작했다가 크게 공포를 느낀 것은, 내가 가족을 만들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명절에 부모님과 외조부모님들을 만나고 나서 이미 내가 가족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취업과 창업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붙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을 최근의 지상 과제로 삼고 있는 나에게 현실적 굴레가 들어섰을 때 나는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물론 이는 멍청이-개새끼 프레임에서 조금 벗어난 주제이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그 가치 판단의 상자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개새끼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 견해로는, 개새끼든 멍청이든 모두 사람이고, 존중받을 만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대강 문제에 있어서도, 진부할 정도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공자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곡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신과 재가에서 경제적 잣대를 현대의 시점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낱 장사치로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독립한 개인으로 볼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멍청이'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더 가치 있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개새끼'를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격한 단어 선택으로 인해 비하의 느낌이 있을지언정, 그들을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내 미래의 모습이라 생각하여 혐오하고 미워하는 때가 종종 있지만, 그것은 내 감정이 격앙된 증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내가 '멍청이'가 되지 못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멍청이'의 선택을 한 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드는 생각은 이 프레임을 알고, 무엇을 포기하면 되는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을 예견하면서도 마치 프레임을 보고 그 밖에서 내다보듯 말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양 축의 프레임을 '어쨌든'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속물' 개새끼인 동시에 속물인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아는데 행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가치 판단의 상자 아래에서 앎은 크게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거나, 모든 상황을 일소할 어떤 힘이 있지 않은 이상, 그것은 인간이 가진 숙명, 딜레마에 가깝다. 하지만 그 상자를 어떤 형태로 재단하고, 정의하여 마치 그 밖에서 파악하고 있고,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여 나는 안될 것이라 판단하여 움직이며, 그리고 자기의 이익, 안위를 생각하는 존재를 나는 속물 외의 다른 단어로 표현할 길을 찾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기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계산적인 이타적 행위 혹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며 이타적 행위를 반복해 왔다는 것을 잠깐의 회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크게 보면 '개새끼' 쪽의 판단을 조금 더 자주 했던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면서 스스로가 '멍청이'인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판단을 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경외감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성향과 별개로 부족한 이성 탓에 어쩔 수 없이 '멍청이' 짓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그 행위 이후에 그것은 나의 가치 판단이었다고 포장하고, 기억을 미화하여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인 양, (스스로 판단하기에) 포장하여 은연중에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 등장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 드라마 뉴스룸을 보며 그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서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며, 멍청이이자 개새끼인 속물을 나의 사이버 스페이스 상의 정체성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공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내가 뛰어넘고 싶은 나의 무언가를 이름짓고, 끄집어냄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록키 발보아의 대사가 떠오른다. 이겨내는 것 만큼이나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다시 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인지라, 혹은 다들 그런다는 것으로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긍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씩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게 낫지.
초고: 2013.07.07
탈고: 202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