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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ul 29. 2019

어린이 콘텐츠

내 멋대로 분석하기 #05

어린이는 문학적으로 언제나 소수자였다. 콘텐츠는 언제나 어린이의 본모습이 아닌 어른들의 눈에 비친 모습만을 반영하였다. 이는 주로 ‘어린이’들이 읽거나 보는 동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표현 주체로 어린이들은 그 역할을 부분적으로 밖에 수행할 수가 없다. 

2019년, 방송계에서 가장 '아이'를 잘 소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

 왜냐면 우리가 보는 어린이상은 어른의 시각에서 보고, 어른의 입장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장부터 이미 왜곡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제작진이 아무리 노력해도 '건후'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큰 전제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를 다룬 콘텐츠의 변화는 꾸준히 있었다. 다만, 어린이가 주체로 등장하는 동화의 경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이 구전 형식이어서 그러한 변화에 대한 분석이 쉽지는 않다. 어린이 주체의 이야기가 기록된 이후의 변화는 매체에 있어서의 큰 변화, 즉 기존의 활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로의 전환이 가져다준 변화와 대중이 인지하는 세계관, 가치관의 전이에 따른 변화를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콘텐츠들의 주된 소비자와 구매자가 다르기에,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구매자 - 즉 부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분석이 어려운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매체의 전환 이전의 극 자체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역할에 대한 분석과, 그 결과로 추론하여 보는 당시 시대가 바라보고 기대하는 어린이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어린이에 대한 선입견 등의 색안경을 쓰고 분석을 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기 때문에, 이 분석에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시작하겠다. 
 
 우선은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어린이상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보통,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부수적 인물이거나, 혹은 주체적이더라도, 어른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아이’ 같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본래 어린이들의 욕심이나 호기심 등의 속성을 배제하고, 어른들이 강요하는 효라던가 하는 가치관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라던가,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하는 모습. 이런 경우에는 분명하게 어른들이 생각하고 상상한, 자신과 다른 타인 집단의 묘사로 등장하는 어린이 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은 오히려, 어린이에 대한 다른 측면의 상상에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 고사에 등장하는 회춘(回春)의 의미라던가, 선동(仙童)의 이미지에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속의 때에 찌들지 않은 선인(仙人)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어린아이의 모습들은, 결국 자신들이 지향하는, 혹은 사회적으로 지향해야 할 모습을 ‘어린이’라는 자각 능력이 부족한 타인 집단에 덮어 씌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성선설이라던가, 세속의 부정함 등을 나타내는 소재로 기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래동화 속에서 ‘어린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어른’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좀 더 따져보면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대충 이 정도의 가결론을 내려보자.

 전체적, 개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현대의 애니메이션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그 ‘아이들’이 등장하는 극의 구조 자체가 고래로 구전되던 문학 장르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실제의 ‘어린이’를 반영하는 데 있어서는 그와 다를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그 종류가 방대하여서, 나는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수준의’그리고 ‘어린이가 주체로 등장하는’으로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데즈카 오사무와 우라사와 나오키의 아톰과 어른들 캐릭터 비교 (출처)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전체적으로는, 철완 아톰 이후의 재패니매이션에서는 ‘싸우는 아이’의 이미지가 많이 차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보통 악당은 늙은 혹은 중년 정도의 나쁜 ‘어른’이다. 악에 물들어서 악행을 거듭하는 ‘어른’에 대항하는, 자신보다 큰 적에게 대항하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차용한 것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아이의 형상을 한 영웅들은, 순수할 정도로 정의에만 빠져 있다는 것 등의 특징을 지닌다. 이는 굳이 소년만화와 같은 싸움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애니메이션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굳이 ‘싸움’을 신체적 혹은 도구를 사용한 ‘전투’의 개념이 아닌 ‘승부’의 개념으로 확장시킨다면, 넓게 스포츠 장르라던가, 요리 장르에서도 이런 ‘대결’ 구도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멍청하리만큼 순수한 아이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순정만화는 현재 트렌디 드라마로 월화수목에 방영되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형식과 유사한 구조에서 권선징악적 요소를 가미한 정도인 즉 결국 선악 대립구도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우는, 그리고 승리하는 ‘어린이’상은 굳이 어린이의 형상을 한, 물리적 나이로 어린이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어린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10~18세 정도의 소년들로, 최초로 공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 소속되고 그 소속에 의무감을 느끼는 시기 이후의 대상을 주인공으로 많이 선정하고 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 부분이 어린이들의 사회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훈적’ 어린이상을 전래동화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도 가지고 있다. 언급했던 ‘어른들이 바라는 가치관, 세계관’을 지는 어린이상. ‘어린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도래할 신세계를 준비하는 세대로 바라본 것과 같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어린이들 역시, 현재와는 다른, 각 제작자가 지향하는 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기능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파일럿들. 설정상 모두 14세.

 아이들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어른의 세계와 대항하게 만드는 연출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재페니메이션의 기념비적인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미지의 적과 직접적으로 싸우는 이들은 아직 학생들로 나온다. <기동전사 건담>의 시작도 소년이었고, <천원돌파 그렌라간> 도 그렇다. 물론, 주 소비층을 타깃으로 하면 당연한 기획이겠다. 하지만, 그 결과 극은 어른의 반대항으로의 어린이를 반복적으로 그리게 된다. <드래곤볼>에서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지만, 끝까지 '아이 같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손오공' 이 주인공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들은 특정 애니메이션에만 국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애니메이션화는 되지 않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라던가 이미 애니메이션화가 된 <몬스터> 같은 작품에서는 악한 이미지를 가진 어린이 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역시도 어린이가 가진 본래의 성질에 대한 ‘어른’적 입장에서의 재해석으로, 비극과 같이 이러한 어린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의 해석도 가능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기 위해서, 작품을 두 가지 선정해 보았다. 전래동화에서는 <심청전>을, 애니메이션에서는 또 하나의 재패니메이션의 기념비, <원피스>를 보자.

 <심청전>에서 심청은 비정상적 행위를 하는 효녀이다. 그 또래의 아이가 즐기는 문화를 향유하지 못함은 태어난바 처지라고 하겠지만, 그 대책 없는 효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돈이 없어 굶는 처지에 인간이 본디 지녀야 할 도리에 대해서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물론 범인들과는 다른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정도의 표현은 나온다.  하지만 오히려 많이 알수록 삐뚤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교육 없이도 몇십 년 살아가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소위 ‘인간의 도리’를 ‘인신공양’이라는 방법으로 이룩하려고 하는 모습은 오히려 사대부들이 바라는 인간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해적이지만 아이들, <원피스> 속 주인공 루피, 나미, 조로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은,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을 하는 유쾌한 일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험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해프닝이 생기고, 그 해프닝의 해결은 대부분 무력행사 이후에 종결된다. 모든 악은 징벌되어야 할 대상이며, 그 악이 악하게 된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가 않다. 주인공 일행의 정신적 교집합은 간단하다. 선함. 혹은 정의. 정의라는 것이 이야기 책 속에서 등장하는 기사가 외치는 정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념과 그 의지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 일행들은 자신들의 정의를 꾸준히 관철한다. 


 물론 이 일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린이’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그들이 지닌, 그리고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극적 주제는 어린이를 위한 권선징악의 동화와 다를 바가 없다. 당연히 극이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이 성장하고, 작품 속의 플롯들이 정교하게 움직이긴 한다. 그러나 기반이 되는 논리는 바뀌지 않는다. 작가인 오다 에이치로가 스무 살일 적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들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나의 선입견이 반영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자기 관점에서 세계를 분석하는 존재에 불과하니깐. 하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본 관점의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의 관찰이 좀 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빠, 어디가?>부터, 아니 어쩌면 <GOD의 육아일기>부터 아이들은 방송 콘텐츠로도 꾸준히 소비되고 있었다. <날아라 슛돌이> 때도 그랬고, <슈퍼맨이 돌아왔다>, 혹은 <위키드> 등 콘텐츠 모두 마찬가지로 꽤 잘 팔리는 콘텐츠였다. 방송가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신호를 계속해서 내뿜을 때도 실패하지 않는 콘텐츠 소재 중에 하나였다. 


 다행일까, 아닐까 모르겠다. 콘텐츠의 소비 방식은 철저하게 관음적이다. 저출산 시대에 상을 줘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역효과도 많이 나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철저하게 편집해낸다. 카메라맨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찍고, 그렇게 찍은 많은 분량의 영상들은 소비하기 좋게 가공된다. 말자막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가지고도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그 안에, 아이들의 주체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육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도 딱히 없는 듯하다. 물론, 간혹 보이긴 하지만, 글쎄?라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실, 방송법이라는 게이트키핑이 되는 영역의 콘텐츠라서, 유명인들의 아이들 위주로 소비되는 편이다. 대중들의 관음에 대한 열망은 방송 카메라로 담지 않아도, 유명인들의 유명한 아이들을 소비하고 있으니, 그 연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방송국이 제1의 영상 콘텐츠 생산자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유튜브가 '당신을 방송하세요(broadcast yourself)'라는 슬로건 아래 론칭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이의 영상을 찍어 올린다. 


 영상은 만들기 어려운 매체이다. 정보량이 많고, 툴도 아직은 어려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건 어른의 시야일 수 있다. 텍스트 기반, 이미지 기반으로 상징화된 세계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과 가능한 유사하게 등장하는 '영상 콘텐츠'의 세계는 아이들에게는 더 쉬운 세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스마트폰 네이티브들 이후, 유튜브 네이티브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일단, 무엇을 어떻게 하는 지를 블로그가 아닌 유튜브에서 검색하는 세대,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틱톡에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세대. 


 그래서 아이들도 어쩌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다. 띠예 ASMR 이, 삭제되고 하던 사건이 불과 얼마 전에 있었다. 사람들은 논쟁을 벌였다. 이것을 소비하는 것이 옳은가,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당신의 논쟁은 아이들이 진정한 주인공으로 콘텐츠에 등장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담지는 못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필요한 이야기였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우리가 아이들에 대해서 인식하는 방식이, 어쩌면 편향되고, 강압적인 것은 아닌가 고민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얼마 전엔, <보람 튜브>의 가족들이 빌딩을 매입했다는 기사가 이슈가 되었다. MBC 노조가 광고비가 그들과 유사한 수준이라는 논평을 내면서 이 이야기가 더 커졌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튜브를 하는 가족들이 일종의 아동학대를 하고 있다는 식의 기사도 나왔다. 실제로 시정되긴 했지만, 아이들이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을 법한 시대가 되어 감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조금은 아쉽다. 그들의 놀이터가 충분히 퍼졌는데, 그곳에 금맥이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이 끼어들 여지가 너무 많아진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그 놀이터에서 돈을 벌면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아이들을 소비하여, 어른들에게 소비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식이라면 과거의 <심청전>에서 뭐가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는 방식에 있어서,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끼어들어 더 끔찍한 결과가 나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짧은 공부로도 현시대에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아름다운 시스템이 아직 고안되지 못한 건은 잘 알고, 따라서 그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무작정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이 놀이터에도 파수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술한 것처럼 반복적으로 '어린이'는 가능성의 존재로 묘사하면서, 실제로 우리는 그러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고, 양 떼를 몰듯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9.07.29에 네 번째로 고쳐 쓰다.

정제하지 못한 글이나 미루면 또 발행하지 않을 것이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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