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분석하기 #04
일어난 적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허구. 그중에서도 생소한 소재에 관심이 가는 편이기도 하고요. 저의 장르 문학에 대한 애정은 아무래도 이런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대중소설로 카타르시스에 몰빵한 전개. 그래서 그럴싸한 가상의 이야기의 최고는 역시 판타지가 아닐까요.
게임도 어쨌든 여러 장르와 스토리가 있지만 왕도는 서사가 중요한 판타지 RPG 장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마냥 장르 소설 중 현대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 가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개에 대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다가, 이내 빨리 질려 버리곤 합니다. 자극적인 음식처럼요.
그러나 이런 대중 콘텐츠는, 시류에 영합하는 특색을 지닙니다. 하나의 유행이 있으면, 빠르게 복제됩니다. 먹방이 그랬고(식신로드 테이스트 로드, 맛있는 녀석들...), 키즈(슈퍼맨이 돌아왔다 등)가 그랬죠. 소재 반복에 대해서, 특정 소재에 대해서 몰빵 하는 한국 장르 문학에 대해서 걱정이 됩니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이 성장하며 콘텐츠 소비에 대한 데이터가 정교하게 나오는 시점에서 콘텐츠 생산자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특히, 개인 창작자에 대비하여, 자본을 투여하여 오랜 제작기간을 들여 콘텐츠를 만들어야만 하는 사업자는요.
빠른 소비는 결국 빠른 고갈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대중 콘텐츠는 큰 줄기에서 기존 기성 문학계 등의 예술 콘텐츠가 쌓아온 토대를 벗어나진 못한다고 보는데요. 대체로. 새로운 시도를 담아내는 것은 상업 서울 담보하기 어려우며, 리스크 대비 리턴을 가져오기 힘들잖아요?
즉, 대다수의 콘텐츠는 서사 기반이고, 이 서사는 신화시대, 영웅서사시 이후 완전히 새로운 플롯을 개발하진 못한 것 같단 거죠. 때문에 결국 대중 콘텐츠는 (시청이나 독서와 같은 형태의 콘텐츠는) 소재 싸움, 캐릭터(페르소나) 싸움이 된다고 보는 편입니다.
<무한도전>을 보면, 캐릭터 기반으로 리얼 버라이어티의 문법을 사용합니다. 즉, 캐릭터를 중심으로 두되, 소재를 다양화하고 새로운 문법을 매번 시도하는 형식이었지요. TV 예능에서 <무한도전>의 말자막만큼이나 이런 캐릭터 중심 전개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한도전>에서는 '리얼' 함을 강조하면서 TV 속 캐릭터와 배역을 맡은 인물을 동일시하도록 하는 연출이 강해진 부분이요.
때문에 각 출연자들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유사한 이미지를 가져갔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하는 상황은 다른 TV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TV 드라마 속 악역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게 불호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죠. 다만, <무한도전> 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봅니다. 실제 출연자의 집으로 찾아간다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신서유기>의 경우에는 플랫폼의 변화 추세에 맞추어서 TV에서는 할 수 없던 일들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경계선을 잘 파고드는 형태였지만, 이도 문법적인 변화가 컸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한도전>과 함께 한국 예능을 이끌었던 <1박 2일>의 캐릭터들이 <신서유기> 시즌 1에 그대로 따라옵니다. 거기에 더해서 그 사이 극 밖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캐릭터에게도 부여합니다. 은지원의 이혼, 강호동의 세금 문제, 이수근의 도박 문제는 <1박 2일> 에도, <신서유기> 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자연인으로의 출연자와 예능극 안의 캐릭터는 합치되어 소비되는 것이지요.
나영석 PD의 칸 광고제 발표 때 언급한 ‘느린 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의 관찰 예능도 마찬가지고요. 어쨌든 <랜선 라이프> <전지적 참견 시점>까지의 흐름에서는 예능은 스탠드업 코미디나 <개그 콘서트>의 콩트에서 ‘리얼한 상황’을 연출하거나, 아예 '리얼' 그 자체를 지상과제로 삼고 제작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캠핑 클럽>을 봐도 그렇고요.
<캠핑 클럽>도 분명히 연출된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카메라가 잘 보이지 않네요? <무한도전>과 <1박 2일>에서 자주 나왔던 'PD'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 콘텐츠는 오히려 캐릭터들만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미션을 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4명의 캐릭터들이 함께 캠핑을 한다는 것, 그 하나를 가지고 찍었고 - 편집을 했습니다. 물론, 편집이 있고 연출도 있었겠지만 보이는 것은 캐릭터입니다.
현실의 모사가 콘텐츠에서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에서, 콘텐츠가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형태로 넘어가고 있달까요. 그래서 웹드라마와 같은 시도들은 드라마와 같은 구도와 화면을 쓰지만, 서사는 갈수록 과격해지고 자극적이던 TV 드라마와 달리 나나 내 친구에게 있을법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72초 TV의 시도들이 그랬다고 보입니다. 이런 추세는 세부 장르로 파고드는 TV와는 제법 달랐고, 지금은 TV에서도 이런 시도가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하였으나 <두니아>와 같은 사례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예능보다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가까운 상황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시청자의 선택에 따른 분기를 주는 연출은 넷플릭스의 <밴더스내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자본의 힘에 못 미치고, 주간 예능이라는 한계상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요. 도네(도네이션의 줄임말)를 받으면 특정 행동을 하는 인터넷 방송의 문법을 빌린 <두니아>는 콘텐츠의 지향점 중 하나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앞으로 콘텐츠의 문법을 바꾸는 시도는 앞으로 더 소중해질 것입니다.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은 같은 플롯 아래에서 새로운 소재를 계속 찾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불패의 소재들은 먹방, 아기, 연애, 그리고 서바이벌 정도로 보이는데요, 글쎄요. 저는 조금 지쳐간단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확고한 <와썹맨> 이나 <워크맨> 처럼 새로운 문법의 콘텐츠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기존의 미디어는 이런 빠른 소재의 교체, 문법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조직이 무겁고, 또한 미디어에 대한 규제도 많지요. 당연히 개인 단위로 제작이 빠른 유튜브와 TV가 정면으로 경쟁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소비가 스낵화 될수록 기존 방송은 소재 싸움으로는 쉽게 이기기 어렵다랄까요.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이슈가 된 소재로, 9시 뉴스를 만들 듯이 콘텐츠를 만들어냅니다.
중소 PP(Program Provider; 케이블 채널) 입장으로 볼까요. 자본의 집중화를 통한 힘을 얻기에도, 글로벌화된 넷플릭스, 디즈니를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MPP(Multi Program-provider)나 지상파 계열 PP 들은 채널 간의 콘텐츠 돌림 막기(어딜 틀어도 나오는 수요 미식회, 맛있는 녀석들)를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중소 PP의 대다수가 특화된 장르를 지향하는 것은 이런 경쟁에서 빠지기 위해서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기존의 방송 소재가 고갈된 종편, 지상파, MPP들은 특화된 영역도 계속 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경우에는 최신의 CG 기술을 집약, 익숙한 배우들을 많이 등장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가는 ‘왕도’와 드라마나 기타 대중 매체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시험적인 시도를 기반으로 개인 방송과는 큰 차별을 두고 있지요. 이는 미국 등의 드라마에서도 똑같이 시도되어, 반복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볼 수 없었던 그림을, 생각하지 못한 전개를 영화에서는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아직은 있으니까요. 아직은 개인 제작자가 그런 그림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요.
이전 글(미디어/콘텐츠 산업)에서 언급한 대승적으로 콘텐츠 소비 트렌드에서, 빈지 뷰잉(Binge viewing, 몰아보기), 언제나 시청 가능함(always accessible)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방송과 같은 영상 매체가 진짜 경쟁해야 하는 대상은 결국은 게임과 같은 더 최신의 예술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은 2시간 내외의 제한된 시간 안에서 승부를 보는 영화와는 또 다른 경쟁의 대상이지요. 영화도,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훌루 같은 OTT와 함께 TV를 위협하고 있죠. 하지만 집안 혹은 밖에서 넷플릭스와 경쟁할 대상은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스위치 같은 녀석들이 아닐까요. 닌텐도는 나이키만의 적은 아니란 말이죠. 게다가 이 녀석은 영화처럼 2시간으로 끝나지 않는 무시무시한 녀석입니다.
소비자의 지갑은 소비자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해 주느냐에 따라 열리게 됩니다. <벤더 스내치>와 같은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다면 그 경험을 보다 더 다양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게임으로 사람들이 빠져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1970년대 이후 비디오 게임 키즈들과 이제는 도트로 표현되는 세상이 아닌 어떤 영화와 비견되는 컷씬(cut-scene; 게임 속 영상)을 보고 자란 지금의 밀레니얼들은 다르지 않을까요. 과거의 게임이란 매체는 오히려 책과 같이 '상상'에 더 치중해야 하던 영상미를 가졌다면, 지금은 오히려 상상을 뛰어넘는 영상으로 게이머들을 압도하고 있으니까요.
장르문학에서 시작한 <위쳐>는 <왕좌의 게임>과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퍼집니다. CDPR의 게임 <위쳐> 시리즈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지고, 넷플릭스가 드라마로 만들었죠. 저는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은 넷플릭스가, 영상매체가 좀 더 자본이 필요하고 매체 파워가 있구나. 하지만 새로운 소재에 대한 반응은 게임이 더 빠른 것이 아닌가.
물론 현재까지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비해서 영상매체는 수동적인 소비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책 읽기에 비해서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적었고, 매체는 그렇게 정보량을 많이 넣게 되면서 소비자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왔고요. 하지만 양방향 통신, 인터렉티브의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능동성을 다시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수동성은 편리함을 대체로 내재하고 있기에 그 영역의 비디오 소비가 단기간에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체감형, 몰입형 영상의 시대 (HMD, AR 등)가 되면 될수록, 인터랙티브 한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기존의 영상 콘텐츠와는 다른 문법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새로운 소재, 캐릭터를 넘어서 문법도 새로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문법의 변화가 아니라 제작의 변화가 필요한 일입니다. 영상은 시간의 예술인지라 - 제작비의 천문학적인 상승이 없이는 이를 기술로 일부 대체 가능한 게임을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게임도 천문학적이긴 하지만…) 선택지를 매번 2개밖에 주지 못하던 <두니아>와, 어차피 설계된 결말로 끌고 간다는 비평을 받은 <밴더 스내치>를 생각하면서 오픈월드 게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니면 멀티 엔딩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게임은? 혹은 참여자 스스로 서사를 쌓아가게 하는 MMORPG는 어떨까요?
시대의 변화는 오고 있고. 소비자는 이미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응한 기업은 기업가치를 키우면서 새롭게 대비를 하고 있지요. 사실 위의 전망이 다 틀리건, 맞건 잘할 놈들은 알아서 잘할 겁니다. 큰 애들은 대체로 대마불사 하지는 않아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는 로직을 따를 것이지요.
문제는 중소 채널이나 CP, 제작사입니다. JTBC의 룰루랄라를 보면서 느꼈고, 스튜디오 드래곤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그런 채널들이 이제는 유튜브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콘텐츠를 잘라 올리면서 시장에 대응하고 있지요. 중소 PP는? 그것도 리소스와 돈이 필요한 일이지요. 오리지널 콘텐츠도 없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 자본도 없으며 유튜브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낡았지요. 그래요. 원래 인생은 인잘잘(인생은 잘 사는 놈이 잘삶)이긴 합니다. 그럼 못살던 사람들은 이 태세에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네요. 그걸 알면 제가 이런 글을 쓰기보단 그걸로 돈을 벌고 있었겠죠. 그래도 언젠가는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겠지라며 계속해서 아무렇게나 분석을 해보고 있습니다.
2018년 언젠가 쓴 글에서
2019년 7월 26일 많이 고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