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the city breathe
Make the city breathe
책을 5권을 읽었고, 10개 가까이 되는 논문과, 많은 기사들을 읽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프로젝트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왜 공공미술인가? 동명의 책 제목에서 충분히 다뤄진 내용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자 한다. 나는 미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그림과 예술에 조약 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련 전문가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물미술장식법 이후로, 외산 개념인 Public Art는 공공미술로 우리나라에 소개가 되었다. 그러나, 왜 ‘미술’인가? 시각 예술을 쉽게 연상하게 하는 미술이라는 단어는 분명 건축물미술장식법에서 파생되었음을 연상하게 한다. 비록, 외국에서 Public Art가 처음 정의될 때는, 시각 예술에 근접한 개념이었지만, Public Art라는 개념이 ‘확대’ 되면서 더 이상 시각 예술이라는 범주로 이를 묶어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에 설치되는 미술 장식을 위주로 하는 규제가 남아 있으며, 선구자적인 예술가들이 하는 행위 예술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념인 Public Design, 공공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국가나 도시의 브랜드를 위하여 외부로 공개된 street furniture나 택시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동질 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장식’을 입히기 시작하면서 공공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팽창하였고 본질의 은폐를 원하는 행정가들은 공공미술이라는 개념보다는 공공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공공 미술이 Art in urban design이라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이는 모더니즘의 개념적 감옥에 갇힌 공간을 해방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공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과 함께, 더 아름답고 동질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도시의 ‘재개발’을 위한 도구로서 – 가장 근본적인 공공 미술의 단계인 헤게모니, 지배 정당화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미술, 아니 예술이란 근대 시기 이후로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이용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감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물미술장식법은 그 고루한 개념 속에서 미술장식이 대중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해당하는 비용을 건축주에게 부과하면서 2004년에 대규모로 드러난 바와 같이 리베이트와 협잡의 온상을 야기하게 되었다. 미술품의 가치를 심의회에서 결정한다고 하지만, 행정가들은 그럴 역량이 부족하고 해당 전문가는 부족했다. 또한, 이를 위한 가이드라인 혹은 매뉴얼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박삼철씨의 ‘왜 공공미술인가?’나 그가 번역한 ‘미술, 공간, 도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공공미술’의 현대적 역할은 공간의 회복이다. 근대성이라는 개념은 ‘쓸모 있는’것들을 도시로 집적시키고 그렇지 않은 것을 외부로 축출하였다. 또한 도시는 기능별로 나뉘었고 사람들은 한 공간에서 단 한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이에, 베드타운과 같은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구 소련의 몰락과 함께 비상하면서 현대인들은 언제나 ‘제작’하거나 ‘이동’ 중이라는 격언은 의심할 바가 없는 진실이 되었다. 하버마스 같은 지성들이 외치는 ‘공론장’은 사라졌다. 아니, 모더니즘 시기의 우리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광장’을 잃어버렸고 ‘밀실’ 속에 틀어박혀 스스로가 만든 우리 안에서 사육당하고 있었다. 집적된 기능적인 구조와 건축물들은 마치 도시가 기계 장치의 신 (deus ex machina) 와 같이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처럼 만들었지만 실상,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미궁(Labyrinth)에 갇힌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미궁에 갇힌 것 같다. 그리고, 그 미궁을 만들어 낸 것도, 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라데팡스는 이런 상황의 타계책을 보여주었다. 오래된 역사 속에서 집적된 파리의 구 시가지를 재개발하지 않고 신 도시를 만들면서 모든 도로를 지하로 묻었고, 대중교통수단과 태초부터 존재한 두 다리 만이 지상의 이동수단인 그곳에는 많은 미술품이 있으며, 광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행정가들이 보는 것은 그런 인본주의적인 ‘master plan’이 아니라 근대 도시의 병폐를 감추고 도시의 미관을 바라보는 방법 – 조감/야경 등의 왜곡된 시각으로만 바라보았고 – 고층 빌딩과 화려함만을 바라보았다.
이는 2009년 용산 참사와 같은 참극의 주범이다. 더럽고, 낡은 도시를 ‘재생성’하겠다고 ‘재개발’한 그들의 행태는 당연하게도 거친 자본의 물결 속에 휩쓸렸고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198~90년대를 풍미한 ‘참여예술’ ‘민중예술’이 채웠다. 카페 레아와 남월당 건물 일대에서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을 풍자하고 가르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예술은 공유 자원의 성격을 가지며, 이는 공공 미술이라는 개념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대국적인 시각에서 – 이는 매우 본격적인 공공 미술의 발현이었다.
물론, 수잔 레이시에 의해 정의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범주에서, 교조주의적인, 계몽주의적인 사상의 공공미술은 구 시대적인 발상에 불과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는 격언과 같이, 공공미술-예술-문화 역시 그들의 수준에 맞는 것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지난가을학기에 배웠던 ‘중국입문’에서 얻은 비루한 나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에 앞서, 프로젝트의 대상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해 보면 – 영국은 귀족이 왕을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입헌군주제로 나아갔다. 흘린 피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응축된 혁명이 아니라 길고 지루한 – 그러나 수많은 의견이 오간 혁명이 일어난 곳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태양왕이라는 별칭의 군주가 지배하는 ‘절대 왕정’의 등장과 집체적인 ‘감옥’의 습격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대변되는 응축된 혁명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나폴레옹이라는 황제를 다시 맞이함으로써 세계 제일의 국가로 나아갔지만 연합군에게, 그리고 시민에게 인심을 잃으면서 순식간에 정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면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사략 해적선을 운영하며 야금야금 스페인 등의 강대국의 주춧돌을 빼었으며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패퇴시키고 식민지 점령을 통해 야금야금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으며, 그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 역시 미국의 독립과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 천천히 내려왔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마르크스의 영향력 아래에서 실질적인 ‘부르주아 혁명’을 이루었으며 지엽적이거나 제한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영향력이 들어가 있었다. 근대 국가의 하층부에 위치한 ‘일반 대중’에게 각인된 이상향은 자본주의에 점령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그런 대중이 공유하는 경험은 메카시즘이 팽배한 냉전 시대를 거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분단의 국가이며 매카시즘의 절정, 반공주의와 ‘자본주의 독재’의 영향 아래에서 압축적인 ‘부르주아 혁명’만을 겪어온 국가이다. (반면, 북한의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겪었다고 판단하면 섣부른 판단일까) 중국 공산당의 영웅,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 없이 압축적인, 혹은 leapfrogging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작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체주의적이고 공산당원 및 그들의 옹호 속에 등장한 연해안 도시의 발전과 그곳에 적을 둔 중국의 ‘인민적인’ 규모의 부자들을 보면 그것이 낭만주의적인 이상에 불과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굳이 이런 배경지식을 언급한 이유는 마오쩌둥의 인생에서 가장 과격하고 의문에 감춰진 문화 대혁명 시기의 배경 사상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인민’의 사상이 그에 근접해야 함을 역설한 그의 의견은, 굳이 사회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시민들도,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수단 – 소위 말하는 재테크 – 의 달인이 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유되는 가치와 이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 3단계 문화 혁명과 유사하다. 이는 동시에 국가와 도시라는 infrastructure 가 상부 구조 superstructure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유의미하다. 이를 다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하여 –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대한 국가가 아니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원문 그대로의 사회 구조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술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시민을 세뇌하기 위하여 모더니즘의 시대를 헤쳐왔다. 지배의 정당화 수단으로써 여러 monument를 세워왔다. 역설적이게도 – 또한 근대 시대가 냉전 시대이기 때문에 – 예술은 헤게모니의 안티테제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프로파간다, 우민정책을 헤쳐 나온 예술은 역시 참여예술이며 구시대적인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대중과 공유되는 경험을 가지고 스스로의 날을 갈아 왔다. 1987년, 여기저기 먹물로 찍혀나간 이한열 열사의 판화와 걸개그림, 페인트 붓으로 그려나간 플래카드들과 피켓들은 우리가 가진 안티-테제로서의 공공미술의 큰 자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공공미술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본이 필요하다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 건축물미술장식법이라는 구시대적 법은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와 더불어 메세나 – 예술을 진흥하기 위한 기금의 마련과 이를 통한 지원이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에 의한 ‘저항권’을 느린 방식이나 빠른 방식으로 겪어 보았기 때문에 – 분명 그들의 정부 역시도 모순과 관료주의적 폐해,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 이런 제도적 뒷받침이 가능했으며, 님비나 핌피 같은 지역이기주의를 초월한 ‘의견’을 가지고 대중적인 사안에 접근할 수 있는 공유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에 우리가 공공미술에 있어서 선진국이라 불리는 두 국가로부터 배워야 할 유의미한 ‘제도적인’ 장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될 수 없음은 물론, 우리나라의 지역성을 반영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국민 의식 속에서는 제대로 동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3.1 운동, 4.19, 5,18 등등 저항의 역사 속에서 거쳤지만 똑똑한 상부구조의 ‘누군가’가 왜곡한 지역주의나 안일주의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역할과 권리, 그리고 그들이 누려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자본주의 물신이 건네주는 꿀단지가 조삼모사식으로 변하고 있을 뿐임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공미술을 통한 의식의 변화와 진정한 의미의 공간의 공공성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2011년의 내가 쓴 글이다.
뭐 어떻게 할지는 내가 고민할 게 아니잖아! 라는 말로 변명해야겠다!
초고: 2011년 5월 17일
탈고: 2016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