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일 글쓰기 (016/100)
드디어 다 보았다. 초반도 그랬지만 몰입이 쫘악 빨려 들어가는 전개는 약한 드라마였다. 등장인물이 많아 옴니버스에 가깝게 계속 전개될 수밖에 없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을 아무리 잘 녹여낸다고 하여도 한계가 뚜렷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신선함과 풋풋함, 누아르에 가까운 장르에다가 멜로까지 여러 장르가 잘 버무려진 오락작품이었고. 같은 디즈니 플러스의 <카지노> 와는 다르게 엔딩 역시 꽤나 깔끔하면서도 다음 시즌을 기대할 수 있는 결말로 이어졌다. 그리고 만화책 원작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긴 했다. 언젠가 볼지도 모르지.
깊은 분석 같은 걸 할 정도로 열심히 보지도 않았고, 원래 그런 능력도 없다. 그냥 이 작품의 제목이 '무빙'인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만 했다.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화 전작인 <타이밍> 이 시간 능력자였다면 <무빙> 은 신체 능력자의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그냥 그것보다는. 갑자기 악동뮤지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전혀 관련이 없는데 왜 나는 이 생각을 했냐면.
작품의 대다수의 캐릭터는 수동적이다. 등장과 함께 적극적인 경우는, 글쎄 희수 정도였을까. 그래서 극 중에 돋보이지 않았나 싶다. 뭐, 배우의 매력이 더 근본적인 이유겠지만, 여하튼. 청소년 역할의 경우, 마지막 화의 제목이 '졸업식'인 것과 맞물려 어리기 때문에, 이제야 알을 깨고 나오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백전연마한 다른 이들은 왜 그런가? 그들은 대체로 가족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숨고, 명령에 따르기도 한다.
그런데 또, 그 가족이 위험에 처하자 이제 다시 그들이 움직인다. 숨어서 잘 살던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다음 세대를 건드리는 무언가이다. 우리가 이렇게 당했다고, 대물림되도록 하지 않도록 끊어내고자. <번개맨>의 아버지가 번개맨(이름이 기억 안 난다..)을 그렇게 둔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고. 나주가 수양딸을 암으로 위장시켜 대피시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작중에 설명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맥락상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조용히 살던 은둔고수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서.
리처드 도킨스 양반이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라고 말할 때, 이는 가치중립적인 '이기적'이라는 표현과 함께, 자기 복제를 위한 기계로의 'gene'을 선언하였는데. 이타성이란 결국 나의 복제가 더 오래가길 원해서~라는 식의 생각이 들었는데. 솔직히 그 책을 요약본과 여러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했지 다 읽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로 자식을 위해 순간순간 superman 이 되는 모든 엄마 아빠들을 생각해 보면 또 그렇다. DJ DOC 가 <슈퍼맨의 비애>를 불렀던 것은, 그 슬픔 이전에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내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30년 전의 내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던 삶을 난 살아낼 자신도 없고, 각설.
물론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이영도가 <순간이동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적은 것처럼, 역시 나의 존재는 너로 인해 가능한 것 같다. 희수도, 봉석도 서로를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 희수가 마지막 결전 즈음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아버지 구룡포와 같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장면. 결국 날아오르는 봉석. 뜨는 게 아니라 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도 결국 체육관에서 위기 상황의 희수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다 보면, 다시 우리 대에서 끝내야 한다는 북한 특수기력자 무리의 생각을 어찌어찌 이해할 순 있겠으나, 역시 20화 내에 다른 서사와 함께 이것을 모두 풀어내는 것은 무리한 시도였단 생각이 든다. 늘어지더라도 작품만 놓고 보면 4화 정도는 늘려야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많은 것을 그냥 그렇게 되었다~라고 넘어가는 것도 미드와 같이 스무스 스무스 하게 넘어가버리고 말아서 좀 그랬고.
그러나 다시 각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너이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것은 아내라는 이유가 있다. (멋없게는 잔소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긍정적으로 보자면 아내가 더 편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뭐 대충 그렇다. 나를 위한 것은 별로 날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사실 의미값이 없겠지만 그냥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무빙> 아닌가 싶고. <눈물을 마시는 새>의 카시다 암각문이 떠오른다. 역시 사람들의 마음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끝나는 작품. 우리를 움직이는 건 마음인데,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적어도 <무빙>의 주연들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내가 아닐 것 같다.
<무빙> 을 본 지 1년이 지나가는 요즘에는 나와 팀원에 대한 동기부여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도 내재적 동기라는 게, 사실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급진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생요인이 아니 더리도. 자기 효능감, 자아실현도 결국 타자를 기반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참선과 득도를 통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열반에 들지 않는 이상에는. 결국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 '너'이고. 따라서 내가 남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초고: 2023.11.20
탈고: 2024.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