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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Nov 29. 2021

武俠, 왕도와 패도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2010년,  2017년의 단상, 2018년에 고쳐 쓰다.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이 나에게, 한국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 150여 년을 제외하고 중국은 아시아의 패권 국가였으며 세계적으로도 과학과 문화에 있어서 전혀 뒤처짐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이 중국에 딸린 문화권이라는 것 역시. 우리의 유교적 관념, 한자 문화권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부터, 원이나 청나라의 한족 외의 왕조까지 포함한 중국에게 우리는 많은 침략을 받았었다는 사실,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6.25 동란 때 한반도의 통일을 실질적으로 저지한 것은 중공군의 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는, 대학에 진학한 후 실제로 수업을 들은 3년 동안 경영학도로서 현재의 중국과 그 미래를 배우는데 한창 바빴다. 과거를 돌아보기에 나는 너무나 바쁜 시대에 살고 있었다.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읽으면서 과거를 되새기는 것은 의미 있으며 미래에의 통찰력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제 사회와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의미를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중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이미지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까닭에, 신흥시장으로 강조되고 있는 현대 중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작 중학교 시절 방문한 베이징에서의 3박 4일간의 짧은 기억들이나 신문에서 단편적으로 접한 팍스콘 사태에서 볼 수 있는 것들, 경영학 수업을 들으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인식한 중국, 베이징 올림픽과 성화 봉송 저지 사건 이후에 있었던 여러 이슈들이나, 그리고 바로 지금 일본과의 갈등. 소셜 미디어에 관심이 많아 조사하다가 알게 된 4억 명의 사용자가 있는 페이스북보다 더 많은 사용자를 보유한 소셜 미디어 QQ 혹은 RenRen. 구글의 중국에서의 실패와 바이두의 존재. 아직도 잘 모르는 천안문 사태와 체 게바라가 존경한 마오쩌둥. 달라이 라마와 중국, 티베트와 위구르의 통치자. 그리고 동북공정. 최근의 한글 키보드 입력체계에 대한 이슈들. 중국산 제품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이런 단편적인 사실 인식에 기반을 두어 신흥시장 중국에 대한 국제 경영적 이슈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제출해왔다.


 위의 중국에 대한 나의 인식들은 긍정과 부정이 혼재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는 다원화 사회에서, 14억 인구의, 거대한 영토의 중국 당연한 것이지만 이미지를 형성하는 사실들에 대해서 실제로 너무나도 무지하였다. 『앵그리 차이나』에서는 비교적 유사한 견해의 지식인들이 논지를 펼치고 있지만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에서 문정인 교수가 찾아간 중국의 지성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시대와 같이 현재 중국 내부에서도 다양하게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두 책은 모두 짧은 사설이나 대담의 형식을 빌려 가능한 많은 관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얻고자 두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두 책을 읽고 나서, 중국의 현재에 대한 인식은 분명 변화하였다. 사실 나의 인생에서 중국의 이미지는 무협지를 통해 형성된 그릇된 것이었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비교적 늦게 접했지만 김용이나 고룡 등의 중국인에 의한 정통 무협에서 보이는 중국은 멋지고 신비로운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비판한 동양 신비주의와 기이한 것들의 등장은 무협지의 특징이다. 그러나 무공이라는 신비한 장치는 그저 소재에 불과하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것은 협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교적 가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브 컬처의 언급은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법이나 가상의 생명체를 등장시키는 서양 문화권의 판타지 문학이 가지는 대중적 파급,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생각하면, 공통적으로 형성된 환상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체계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때문에 비주류의, 대중소설에 불과하지만 그를 통한 분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나의 성장 과정에서 서브 컬처를 많이 접하면서 고전이나 학업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 외에, 서브 컬처를 통해 자아나 세계관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두 책을 보고 중국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나 그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미래에 대한 제언을 하기 위해서는 언급이 불가피하다.


 또한 서브 컬처는 주류 문화의 반동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받기에 거울과 같은 양면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서브 컬처를 통하여 비주류 문화권에서 음성적으로 형성되어있는 중국에 대한 인식들을 나름대로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2권의 책 『앵그리 차이나』와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를 읽고 『중국의 외교 전략과 국제질서』, 『전환시대의 중국의 사회계층』을 부분 참조하여 작성자가 접한 서브 컬처에서 형성된 중국관과 미래 세계에 대한 비전에 대한 성찰 및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종의 편협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경영학도로서 중국을 신흥시장과 개척의 대상으로 국한하여 여기지 않게 하고자 한다.


 먼저, 일본의 서브 컬처를 보겠다. 애니메이션의 소비자는 많지만, 고급의,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문화가 아니며, 한국에 들어와서는 완전한 비주류권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서브 컬처의 한 갈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사 중, 선라이즈(Sunrise)라는 곳을 보면 재미있는 관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제작사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의 우파적 견해가 어느 정도 담겨있는 작품을 제작하는데, 비교적 최근 제작한 작품에서 재밌는 미래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방영된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라는 작품과 코드 기어스:반역의 를루슈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비교적 근 미래 - 평행우주의 관점이지만, 실제 국가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 미래상에 대한 서사로 볼 수 있다 - 를 그리고 있는데, 세계는 3개의 패권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EU를 기반으로, 다른 하나는 미국을 그리고 나머지 한 축을 중국이 맡고 있다. 일본은 어떤 형태로든 미국 측에, 한국은 중국 측에 가담한 것으로 두 작품은 그리고 있다.


 싸움과 전쟁, 서로에 대한 이해라는 비교적 큰 테마 속에서 그린 작품이지만 그런 서사를 보면서 마냥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나는 처음에 ‘중국은 나쁘고 미국이 더 낫다’라는 냉전시대, 이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중국은 패권 국가로 성장할 것이고 아시아 권역을 통합할 것이라는 초보적인, 그리고 극단적인 관측은 실제로 미국이라는 국가와 전략적 동맹 관계로 많은 자주 국가로의 안보 기능을 미국과의 연계로 풀어나가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과 대조하여 본다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상상이 새로 떠올랐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비관적 견해가 아니더라도 14억이라는 중국의 인구수는, 숫자 자체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위험 요소이다. 정말로 중국이 흔히 말하는 ‘선진국’으로 굴기했을 때, 국민의 구매력이 상승하고 육류 기반의 식습관, 자동차 중심의 문화가 형성된다는 현재로선 당연하고 그래서 더 무서운 예측을 할 수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나 소의 소화활동에서 비롯되는 공해물질 등 어려운 계산을 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맬서스의 이론을 맹신할 수는 없지만 세계 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 ‘잘 산다’라는 것은, 그만큼 자원의 소비가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고 현재의 식량이나 재화의 생산능력이 진보할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혹은, 그것은 권력의 측면에서 다른 국가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자연적으로 기본적인 자원을 위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두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전략적 자원의 등장과 그것의 차지를 위하여 국제적으로 거대한 블록화가 일어나는 미래를 그렸다. 물론 『앵그리 차이나』나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에 나오는 저자들은 그런 가능성을 비교적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너무 크다. 중국 인구수는 너무 많다. 이런 인식에서 평화굴기론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야를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전환 시대의 중국의 사회계층』에서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책에서 한국은 급격한 사회 변화로 사회이동성이나 계층 간 격차의 심화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한국과 같이 급격한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동 속에서, 사회 계층 간 격차의 심화와 더불어 하층민의 계급의식이 형성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단순히 사회의 변화 속도뿐만이 아니라 중국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소통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이 되더라도, 물리적 거리의 차이로 인한 지역 차이, 역사에서의 차이는 이러한 차이를 유발했을 것이다.


 이런 빈부격차의 문제는 중국에 분명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2008년의 올림픽이나 지금 일본과의 분쟁,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앵그리 차이나』가 말하는 ‘화난’ 중국인들은 해안가의 대도시 혹은 해외에 유학을 나간 ‘잘 사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또한 『앵그리 차이나』의 역자가 지적하듯이 그런 ‘분노’는 외부로 편향되어 있다. 지금의 중국의 성장 뒤에는 많은 시행착오로 이뤄진 굴곡이 있었지만, 현재 중국 정부에 대한 심층적인 비판의 시각은 책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책에서는 정부나 주류 학계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현재의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들이 이슈가 되고, 경제적으로 열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식이 공유가 되어 종국에 중국 내부에서 급격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가져올 파급은 분명 인구가 1억이 안 되는 나라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앵그리 차이나』, 『중국의 내일을 묻다』에 나오는 지식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정책의 시행을 이야기한다.


 특히 『앵그리 차이나』의 경우 언급한 외부로의 분노의 표출의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번역자가 해 둔 말처럼 중국은 화났으며, 중국은 굴기할 것이며, 중국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논조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문제는 어떤가. 브래튼 우즈 체제 하에서 달러화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리고 항공모함으로 상징되는 무력을 앞세워 세계의 질서의 중심에 서 있는 미국. 『앵그리 차이나』에서 보이는 모습은 미국의 ‘칼을 들고 장사’하는 모습을 마키아벨리즘 차원에서 접근한다. 중국 역시 그러한 방법의 사용이 가능할 수준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요즘 이야기되는 G2나, 혹은 그 이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 세계에서 패권 국가로 가장 오래된 역사적 경험을 한 국가는 중국이 분명하며 ‘중국의 정확한 인구의 파악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의 인구도 파악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엄청난 대국을 경영한 능력은 새로운 패권 국가 중심의 질서에서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 『앵그리 차이나』나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에서는 시종일관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로의 굴기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럴 능력을 갖추리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거나, 그런 능력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차라리 중국이 더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부정할 수는 없다. 국내에도 이미 만연한 반미의 논리에 부분적으로 동의를 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이미 무너졌다고 판단한 사회주의의 새로운 미래상, 진정한 유토피아를 중국이 실현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내일을 묻다』에서 나오듯 만약 중국이 이런 ‘왕도’로 나가지 못한다면 ‘패도’로 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앵그리 차이나』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인식은, 『중국의 외교 전략과 국제질서』에서 언급한 길핀(Robert Gilpin)의 패권 안정 이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춘추전국 시대를 끝낸 것은 유가의 사상이 아니라 법가였다는 것처럼.


 다시 다른 서브 컬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세계적으로 시드마이어의 문명 5(Sid Meiyer's Civilization V)라는 게임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역사 속의 유수한 문명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외교나 점령, 과학 혹은 기술, 사회적인 방법으로 BC5000년부터 AD2500여 년 까지의 기간 안에 최고의 수준에 올려놓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최고의 수준이 되는 기준을 보면, 각 문명을 제외한 작은 국가들의 표까지 합쳐서 일종의 세계 정부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 하나 있고, 전쟁을 통한 승리, 인류를 우주에 진출시키는 것 마지막으로 사회 정책, 이를테면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등 이념적인 연구를 통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형태로 문명이라는 서브컬처는 복잡한 사회와 문명에 대한 매우 초보적인 비유를 통한 인류의 역사와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전쟁, 점령을 통한 승리를 제외하고는, 인류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선도적인 국가로 선정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후자를 왕도, 전자를 패도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게임의 난이도를 높일수록, 점령에 의한 승리가 아니면 더더욱 어려워지는 특성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략적 자원의 획득을 위해서도,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외교를 통하기보다는 전쟁을 통한 점령, 혹은 정전 협상을 통한 갈취가 효과적이다. 『앵그리 차이나』에서 말한 ‘칼을 들고 장사를 한다’가 다시 떠오른다. 게임이라는 서브 컬처의 특성상 전투 부분에 강조를 했지만, 복잡한 현대의 국제관계를 떠올려 보아도 근본적으로 비슷한 양상이 일어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2개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원에 의한 전쟁을 그리고 있다. 폭력적인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욕구, 전투 로봇이라는 완구류의 판매를 위한 서사구조이긴 하지만, 또한 대중적으로 항상 걱정하고 있는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가 진화하거나 기술적으로 현재 수준을 획기적으로 뛰어넘거나, 전 세계인이 한 마음 한뜻을 먹지 않는다면, 한정된 자원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나아가, 초월적인 패권에 의해 안정화된 세계가 가장 합리적인 것인가.


 한국의 서브 컬처 문학 중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이영도의 환상문학 소설 시리즈를 통하여 다시 살펴보자. 그의 가장 최근 장편,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를 보면 모든 종족들의 완성을 위한 길에 대하여 서사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네 종족은 서로 너무 다르며, 다들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느 한 종족이 완전한 진화, 즉 ‘완성’되어 버린다면 나머지 종족은 ‘완성’으로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네 종족이 모두 협력을 해야 한다고 작가는 서술한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나도 멀다고, 소설에서는 그것이 몇 십억 년의 길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래서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그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제국의 구축과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아버지’와 같은 신격 대응 물, 초월적 존재를 묘사한다. 하지만 인류는(모든 종족들은) 그 길을 반대한다. 서로 부족한 상태로 계속 싸우고 갈라서고 오해하는 길을, 더 오래 걸리고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길을 인류(종족들)는 선택한다.


 현대 국제 사회는 어떠한가, 운송 기술의 혁명과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이 있었지만, 권력과 자본의 격차로 발생한 변두리에 존재하는 국가들, 사회들, 민족들, 대륙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대 국제 사회이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패권 국가와 그것을 견제하는 다른 강대한 선진국들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는 신흥 성장국들. 그리고 흔히 G20이라고 논의되는 곳에서 조차 끼지 못하는 국가들은 사실상의 변두리이다. 물리적, 군사적으로 서로 싸우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서로 협력을 한다는 모습이 자주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이영도의 같은 작품에선, 전술한 대륙과 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을 일종의 ‘이동수도’를 통하여 통치된다. 일종의 거대한 상공의 항공모함, 아니 비행 도시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중심이 어디로라도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작가는 이 제국에는 어느 곳에도 변두리가, 외지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하나의 세계 통합 기제이다. 이런 변두리 없는, 통합된 세상의 이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중심-변두리 모형에 입각한 세계 구도 안에서 중국은 특별하다. 내부적으로 처리한 문제가 많이 남아있지만, 국제 사회에 있어 외적 이미지는 이미 G2에 근접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앵그리 차이나』나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의 중국 지식인들은 현재 이중적 모습을 간직한 중국은 내부를 다지는 것에 이미 모든 여력을 쏟아야 한다고 거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


 곧 패권을 가질 것으로 보이는 중국이지만 사실상 내부 기반을 다지기에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두 책의 논조는 중국 지성의 주류와 비주류파의 의견으로 분명히 다르지만, 중국의 내부를 다지고 국제 사회에서 대국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함에는 거의 유사한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영도의 책에서 나오는 힘을 통하여 간신히 유지되는 세상, G2와 같은 2개의 패권국가에 의해 안정되는 국제질서가 아니라 G20 혹은 UN 등 다국가 협의체의 발전을 통한 국제적 협의기구의 성장 속에서, 본질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중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너무 촘촘한 관계망 속에 갇힌 현대 국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민족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단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책에서 세계 평화나 국제 질서의 재정립,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중국의 역할 등 다양한 말을 하고 있지만, 민족국가의 범주를 넘어서는 시각은 그렇게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두 책에서 ‘중국’에 대한 일정 수준의 비판은 존재하지만 중국의 특성상 국가에서 금기시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보조 자료로 사용한 도서관을 뒤지면서 찾아낸 한국 학자의 글은 말 그대로 연구서로서 ‘중국’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현재의 사건들의 언급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기반을 둔, 농민까지 넓은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에 포함시킨 마오주의가 넓게 퍼졌던 사회주의 국가에, 노동 문제가 연쇄 자살 사건으로 까지 번진 팍스콘과 같은 사태의 발생, 그것은 단지 제국 자본주의의 첨병인 다국적 기업에 의한 단순 범행으로 봐야 하는가? 혹은 도덕적 해이 상태의 회사 경영자의 문제인가?


 『앵그리 차이나』에서는 또, 티베트의 통치권 문제에 대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서구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정당성을 언급하면서 정작 인류의 기본적인 권리의 문제를 야기하는 파륜궁(법륜궁)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서는 굉장히 민감한 영역인 동북공정에 대한 문정인 교수의 질문에,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의 중국 지식인들은 논리적으로, 심정적으로도 타당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단지 역사 연구의 일환이며 일부 학자들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럴 것이라는 부분은 이해가 된다. 동북공정 전에도 한국의 재야 사학계의 주장이나 극우 일본 지식인의 주장이나 일부 역사학자의 의견에 불과함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중국이 그러한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중국이 서구의 패권 국가 체제에 화가 났다고 하면서, 중국이 굴기할 것을 알면서, 결국 그들도 힘을 가진 자의 지위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일까.


 이제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무협지는, 동북공정의 논리와 같이, 중국에서 비롯된 부분은 있지만 한국에서 소비되기에 무협지들은 분명 한국의 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장면이 한국 음식과 다름이 없듯이. 하지만 무협지의 배경은 대부분 원·명·청대 중국을 대상으로 한다. 어차피 현대 중국과 단절된 곳이라고 판단할 수 도 있지만, 역사는 연속적인 것이며, 결국 그 이미지를 현대 중국인에게 일정 부분 전이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현대 중국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들, ‘만만디’라던가 'made in china'라는 단어, ‘짱깨’라는 비속어 등에서 나타나는 국내에 널리 퍼진 중국에 대한 인식들의 반발로 무협지에서 보이던 협사를 떠올려본다. 전술하였지만, 그러나 유교나 의리, 이런 것들은 매우 이상적인 부분이며 실제로도 제자백가의 시대부터 『중국의 내일을 묻다』에서 말하던 백가쟁명의 현대까지, 큰 나라 중국은 매우 복잡한 실체이다. 분명 단순한 서브 컬처 속의 이미지에서 비롯하여 그들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에 있어 서브 컬처 - 즉 무협지에서 형성된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이 내부 단속을 더 중점적으로 하고, 균형 발전, 현 중국 공산당의 정책 기조와 같이 나가거나 『앵그리 차이나』에서 말하는 어조로 나가거나 어쨌든 13억의 인구가 있는 대국은 최종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말 자원이나 기타 문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어쨌든 패권을 지닐 수 있는 국가로 - 패도로 나가거나 왕도로 나가거나 그들의 힘은 강력해질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내일을 묻다』나 『앵그리 차이나』 두 책에서 항상 중국은 대국이라는 것을 지식인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힘을 인지하면서도, 화평굴기라던가 세계를 생각하는 모습은 인상이 깊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중국이 정통 武俠의 脇士와 같은 사고로, 그 이상을 진정한 천하(天下)를 대상으로 펼쳐주었으면 한다는 것, 이것이 중국의 이미지에 대한 비주류 문화를 통한 접근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문명 5에서 나오는 우주 진출을 통한 새로운 식민지 개척시대나 전쟁을 통한 점령이 아닌 이상 영토와 인구수에서 오는 국력은 현실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선도적 국가가 되기 위한 기반이 될 필수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정말 크다. 그러나 과거의 세계사를 뒤돌아보면 물리적인 장벽으로 인하여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그 크기에 비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물론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들의 역량에 비해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류 및 정보기술의 혁명 등으로 이제는 흔히 말하는 글로벌 시대이며, 1970년대의 시장 개방 이후로 중국은 촘촘한 국제 관계망 안에 들어와 있다. 


 중국은 이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왕도인가 패도인가. 중국이 가진 내부적 문제의 해결이 먼저인가, 파이를 키우는 것이 먼저인가. 이런 논의는 실재성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다. 중국은 너무 크고, 이제는 국제 관계망 속에서 너무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이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만 처리하고, 홀로 굴기한다면 중국도 세계도 이제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희망적인 견해도 가능하지만, 자원 희소성이라는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10년 후나 20년 후,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인지해야 할 때이다.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나, 홉스테더의 연구에서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인들은 장기적인 안목의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들의 연구가 정확했기를 바란다. 중국은 정말 장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홀로 완성으로 나가는 길은 불가능하다. 아니, 홀로 우뚝 설 수도 있지만, 이는 결국 인류 전체의 퇴보와 다름이 없다. 결국 모두 같이 가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앵그리 차이나』 나 『중국의 내일을 묻는다』에 나오는 주류나 비주류의 지식인들은 이런 점을 인식했는지, 진정으로 전 세계적 상생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 국가로의 중국이 우선한다. 물론 중국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사람이 세계 시민으로 자각하여 상생의 길을 열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의 선두에는 13억 인구라는, 세계의 1/5를 차지하는 중국이 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武俠이라는 보고서 제목은, 왕도와 패도의 이분법적 구분에서는 현실적으로 중국이 취할 길이 단지 실용주의적 안목에 근간하면 안 된다는 개인적 바람이자 제언이다.

 나는 여기서 武를 본래 의미와 다르게 ‘힘’이라고 정의하겠다. 중국은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커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 사용될 것인가? 왕도로 나가나 패도로 나가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義俠心이다.


 이상적인 의견일 수도 있다. 그저 학부생의 치기 어린 발언일 수도 있지만, 팍스콘, 파룬궁 사태를 보면서, 진정 ‘인민’을 위한 중국은 어디로 갔는가 묻고 싶다. 사회주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마오의 사상은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무협지는 武만 가지고는 이야기를 끌어 갈 수 없다. 만약 그런 책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잘난 체 하는 이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俠을 통해 무협지를 읽는 이들은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무협지를 읽으면서 중국인의 협의 지도를 꿈꾸었던 소년은 이제 중국에게 질문한다.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단계적 사고는 더 이상 현실성이 없다. 우리는 모두 천하의 아래에 있다.



2010년 중국 관련 수업 리포트 제출 후,

중국 독서 모임을 시작하면서 고쳐 쓰다. 


읽은 책

  『앵그리 차이나』『중국의 내일을 묻다』『중국의 외교전략과 국제질서』 『전환시대의 중국의 사회계층』<아시아의 힘> 


201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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