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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ug 22. 2019

가을의 마법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4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1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2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3


 마지막 편지를 보낸지도 수년이 흘렀네. 첫째 조카는 이제 걸어 다니고, 둘째 조카도 태어났네, 지금은. 나이가 든 너희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을까? 형제만 있었던 삼촌은 잘 모르겠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네. 


 오늘 오랜만에 다시 편지를 쓰고자 마음먹은 이유가 그거거든.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들. 70억 이상이 살아가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리가 서로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삼촌이. 그래서 다시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들기게 되었어.


 음, 오늘 할 이야기는 조야하고 -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중학생쯤만 되어도 도덕 시간에 지겹게 들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어.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 삼촌도 그런 교육을 받았을 텐데, 그걸 실감한 것은 훨씬 나이가 지나고 나서야 였기 때문이야. 진부한 이야기들. 민주주의. 평등과 자유. 사람의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 어렵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려운 이야기들이지.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타인에게 구속되거나 얾 메이지 않는 채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 이건 이영도 작가의 <폴라리스 랩소디>의 첫 챕터에 나오는 말이란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런 류의 대화가 나오지.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이에게, 다른 이가 물어봐. 왜 노예를 계속하려고 하죠? 노예란 무엇입니까. 인권이 없는 존재.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다운 것. 사람다운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다음 말은 없어. 


 중학교 시절 즈음에 이 글을 읽으면서 삼촌은 고민에 빠졌단다. 자유란 무엇일까. 얽매이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새장을 소유한 이는 새를 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라 새의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새의 모이를 주고, 새장일 치우는 이가 새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새를 소유하지 않아야겠지. 그러니 진정한 자유는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 일까. 


 그러니, 결국 먼저 말한 친구는 자유로운 사람일 거야. 무엇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품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일인 셈이지. 이런 쓸데없이 현학적인 자유에 대한 정의 속에서 삼촌은 스스로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단다. 일체유심조 - 그러니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불교철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나, 진정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달성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이건 말장난이기는 해.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 저런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필요 없이 -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이 있으니까. 학생은 학업의 노예이고, 직장인은 직장의 노예라는 말이 그냥 세태에 대한 풍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우리는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시스템에 우리의 벌이의 일부를 납부하고, 그 안에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이런 거야. 더 이상은 스마트폰 (너네 때에는 스마트폰보다 더 혁신적인 기기가 나와있으면 좋겠네)이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들. 전화가 없이 어떻게 옛날에는 일했을까? 고민하는 우리들. 니콜라스 카라는 양반이 <유리 감옥>이라는 책을 썼지. 그 내용 자체는 사실 별로 인상 깊지는 않았어. 하지만 제목 자체의 통찰에 대해서는 꽤나 깊은 감명을 받았지. 우리는 스크린 -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정보에 갇혀 살고 있는 거란다. 그 안의 정보는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내뿜고, 그것을 프레임 속에 누군가가 잘 가두어둔 것이지. 어떨 때는 진실과 동떨어질 수 있는 그 정보들과 그 정보를 둘러싼 시스템에 우리는 갇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너무 어려운 이야기일까. 좀 더 쉽게 생각을 해볼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지.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이런 큰 것들로부터 서로 간의 우정과 사랑, 이런 게 있을 거야. 우리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와 관계의 노예들인 셈이기도 하지. 정보란 결국 그런 거대한 서사와 각 개인,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일 테니까. 




 봄과 겨울, 여름에 대해서 지난 편지에서 꽤 많이 언급했던 것 같아. 그리고 가을에 대해서도 슬쩍 언급하고 지나갔지. 가을. 얼마 전에 2019년의 대한민국은 입추라는 절기를 지났단다. 가을이 되었다는 거지. 가을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라자> 속 '마법의 가을'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단다. 무언가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되기 전에 무언가가 이뤄지는 마법의 계절.


 가을에는 많은 열매들이 영글지. 아시아에서는 주식인 쌀이 수확되는 시기이기도 하고. 추석이라는 명절에는 그래서 햇살, 햇과일들을 제사상에 올려, 옛 조상에게 인사들 드리곤 한단다. 그리고 또한 가을은 끝의 계절이지. 낙엽이 지고, 사람들은 패딩을 미리 사두기 시작해. 나무도, 사람도 겨울이 올 것을 아니까. 그래서 많은 서사의 끝은 곧 가을이야. 겨울은 에필로그이고. 


 겨울이 온다. (Winter is coming) 조지 R 마틴이라는 작가가 쓴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작품 속 '스타크' 가문의 가언이야. 여름과 겨울밖에 없는 소설 속 세계, 웨스테로스에서는. 여름과 겨울이 매년 반복되지 않고 수년에서 수십 년의 텀으로 찾아온단다. 그렇기에 겨울은 혹독하고, 여름은 풍족하지. 그 세계 속, 북쪽의 경계를 지키는 스타크 가문은 항상 겨울을 준비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지. 


 응, 그래. 가을은 겨울을 맞이하는 계절이야. 코스모스가 흩날리고, 나뭇잎 색이 변하기 시작하면 이미 코트를 세탁 속에 맡길 시간은 지난 거지. 이제는 다가올 겨울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된 거야. 이때까지 내가 쌓은 인과들이 열매 맺는 시기가 지나고 - 다시 한 텀을 쉬어가는 겨울을, 씨앗을 지켜야 하는. 마지막 불씨를 지켜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시기. 추수와 수확의 기쁨에 앞서, 곳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지금의 한국을, 2019년의 한국을 삼촌은 그렇게 바라보고 있단다. 지난 편지에서 썼듯, 겨우내 지킨 씨앗이 열매를 맺었어. 세상이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것에 화를 내고, 새로운 씨앗을 찾고 있지. 새로운 씨앗은 열매 속에 있어. 그러니 그 과즙, 과육을 먹지 않고 씨앗을 챙겨두어야 해. 겨울이 오니, 먹을 것은 또 따로 빼두어야겠지. 하지만 사회는 농부처럼 현명하지가 않아서 그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 그저 가울이 왔는데 겨울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겠지. 


 



 자유 이야기와 가을 이야기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긴가 하고 생각을 할 거야. 처음에 서로 돕고 사는 사회는 무슨 소리인가 하고 또 생각할 테고. 응, 이 모든 것이 지금 삼촌이 보고 있는 지구 저 편의 땅, '홍콩'의 이야기와 연결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다. 


 지금 홍콩은, 삼촌이 한참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던 한국만큼, 혹은 더 심한 겨울 속에 있단다. 복잡한 문제가 있겠지만 요약하자면 홍콩은 지금의 홍콩 정부와 - 그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작태가 맘에 들지 않아. 왜냐면 그것이 자신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 여기거든. 실제로도 정부에게 험한 말을 하던 분들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사건이 여럿 있었고. 


 그래서 홍콩 정부와 중국 정부가 범죄자 인도 조약 같은 것을 처리하려 하자, 홍콩에서는 난리가 났었지. 그 과정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지난 편지에 썼듯,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같이 흘러나왔고. 홍콩이라는 곳의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과 낮은 임금에 고통받는 이들도 들고일어났어. 


 사실 그 이전에는 청나라 시절로 돌아가서 이야기할 필요도 있지. 2019년의 홍콩은 일국양제라는 체제 아래에 있어. 그러니까, 중국이라는 나라임은 분명하지만, 다른 제도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거야.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를 통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홍콩은 그 나라의 역사와는 다른 100년을 보냈거든. 


 홍콩은 그저 그런 어촌 마을이었는데, 아편 전쟁 이후에 영국이란 나라에게 넘어갔어.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영국에 의해서 항구 도시로 개발이 되었고 - 영국이 할양해간 기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어. 홍콩의 위치가 아시아에서 괜찮은 항구도시이기도 하고, 영국이라는 나라는 식민지배라는 짓을 나름 효율적으로 해봤던 국가라서. 올바름의 판단을 떠나 그랬다는 거야. 


 그러니 다른 중국과는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되겠지. 민족적으로는 같은 뿌리를 두었으나, 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 그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의 노예였지. 그런데, 아뿔싸. 옛 청나라 시절부터 중국과 영국이 약속한 시간이 지나가버렸어. 이제, 홍콩이라는 곳인 중국의 품으로 가야 하지. 그러니, 다른 이야기 속으로 홍콩 사람들이 포함되어야만 하는 거야. 


 이게, 이게 정말 자유의 부재라고 생각해. 왜, 홍콩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을까? 사실 홍콩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홍콩을 민주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으니 당연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민의 뜻을 묻지 않고 독재를 하는 공산주의라니, 이념의 노예라는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네. 인민의 총의가 옳은 것이냐를 떠나, 그 총의를 무시하는 행위야 말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까, 싶거든 삼촌은.


 그러니까 자유란 - 다시 얽매이지 않는 것이야. 그것은 삼촌에게는 꽤나 지상과제란다. 어떤 관계나 이념, 생각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삶은 어쩌면 사람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거든. 그런데 이게, 있다고 착각하다가,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렴. 끔찍한 일이지.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구한말에 일제에 병합당한 시절 조선의 양반 중 일부 사람의 마음 같을 거야. (왜냐면, 일부 양반은 친일파였을 것이고, 많은 백성들에게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아니었을 테니까. 물론, 점차 민족자결주의부터 시작하여 독립의 의지는 타올랐겠지만) 


 이 상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단다. 홍콩에도 우산 혁명이 있었고, 절반의 성과를 거두었었지. 어느 정도는. 우산 혁명을 주도한 조슈아 웡은 세계적인 인사가 되었고, 원내 진출한 정당을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이게, 어쩌면 그들의 가을이었을지도 몰라. 그들은 여전히 여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벌써 겨울이 와버린 것은 아닐까, 삼촌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어. 


 현실적으로 보면. 과연 중국이 작정하고 홍콩에 개입하는 현 상황에서 중국을 말릴 이가 어디에 있을까. 미국도 뒷짐 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국제법으로 따져도 이기기는 쉽지 않아. 당연히 중국 국내법과 홍콩의 법도 홍콩에서 우리는 중국의 요구와는 달리 '홍콩인'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되어 있겠지. (잠깐, 물론 홍콩 안에는 중국 정부와 궤를 같이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어)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남은 패가 없어 보이기도 해. 작은 도시. 많은 인구가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체제. 독립하기에도 변변찮은 사회 시스템. 도와줄 국가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그들은 겨울을 보내며 씨앗도 불씨도 잃은 것처럼 보여. 물론, 그들의 탓을 하는 것은 아냐. 그럴 수 있을만한 상황이니까. 


 



 가을이야, 열매 맺는 나날들. 파랗다 못해 창백할 정도로 높게 솟은 하늘 아래에서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아직 따뜻해. 땀이 나다가, 오한이 나다가 할 정도로 날씨가 제멋대로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서늘하지. 바람에 흔들거리는 꽃잎들이 핀 길을 따라 걸으면 기분 속에 향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나날이 될 수도 있지. 곳간은 차고 차곡 쌓이고 있고, 수확은 축제로 이어져. 기쁨이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기분이 들지. 


 하지만 누군가는 불씨를 지켜야만 해. 바람이 거세어지고 있으니. 태풍이 올라오기도 하거든. 또 누군가는 올해 수확한 것에서 내년을 준비해야만 해 그리고, 그리고 또 여유가 있다면 이웃에게 종자를 나눠줄 수 있겠지. 그들의 땅에도 먹을 것이 난다면, 마을이 모두 더 풍요로울 수 있을 테니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가 지구촌이라면 - 모두가 이웃사촌처럼 되어야만 하는. 세계 시민으로 성숙하고 민족주의와 국가 중심주의를 벗어나 '지구'를 공유하는 생명체로 보다 더 품격 있는 개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종자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은 성숙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내가 풍족한 가을에, 충분히 먹지 못할지라도. 


 사실 지금 지구는 오히려 삼촌 기준의 근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야. 보수화되어 가는 젊은 친구들과, 과격화되어 가는 민족주의. 국가 간의 대결구도는 더 격화되고, EU와 같은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 보여. 사람들 간의 연대는 여전히 미약하고, 문제는 쌓여만 가고 있지. 그러니 우리가 서로에게 먹을 것을 아껴, 씨앗을 나누는 일은 그리 자주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아. 그걸, 지난번 편지에 써두었었지. 우리가 긴 터널을 지나 빛으로 향할 때, 박수를 쳐주던 사람들이 있었어. 세계 곳곳에 있었고 그중에 홍콩의 사람들도 있었지. 그들은 지금, 홍콩의 시위 현장에서 우리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리기도 했어. 응, 우리의 거리에서도 이제 많이 사라진 그 노래. 우리의 씨앗이 전해 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삼촌이 외근을 다녀오는 왕복 2시간여의 택시 안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반복해서, 반복해서 들었단다. 여러 사람의 버전으로, 그 서글프고 아픈 가사를. 노래는 어떨 때 이야기보다 더 멀리 - 그리고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도록 퍼져나가지. 




 도덕책으로 돌아올게. 삼촌이 고루한 옛날 사람이고, 사회 부적응자 같이 체제에 불순응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삼촌은 생각보다 순응하는 사람이었어. 편지를 쓰지 못한 지난 2년을 생각하면 더욱더.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를 재기만 하고, 말을 하진 않았어. 비겁하게 뒤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많았지만. 


 하지만 오늘은 소셜 미디어에 왼눈을 가린 사진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한국에서는 김의성 배우님이 제안해준 글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홍콩에서 시위 중에 최루탄에 맞아 왼눈이 실명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세계에서 최루탄을 가장 잘 생산하고 많이 수출하는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불과 30여 년 전에 그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어. 


 삼촌은 비루한 사람이고. 아마, 언젠가 중국 여행이라도 가려면 이러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소시민적인 생각 속에서 사진을 찍고, 올렸어. 홍콩 사람이 답글을 달아 주더라. 고맙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아. 그리고 생각했지. 어쩌면, 우리가 종자를 나눠줄 만큼의 친절이 힘들다고 생각해서 손을 내밀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저 따뜻함을 전할 수 있었으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가을이 마법적이 되려면. 영미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법적인 순간이 가을에 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에 덜 얽매이게 하려면 -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일은 나 하나로 뭐가 되겠어,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어하는 것을 해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삼촌이 좋아하는 최규석 화백의 <100도>라는 만화에 이런 말이 나오지. 물은 100도에 끓는데, 그전에 0도에서 99도까지는 아무리 열을 가해도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러다가 마지막 1도가 넘는 순간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한다고. 


 그 책을 읽고 나서 삼촌은 용기를 얻었었었지. 그리고 잊고 있었던 것 같아. 홍콩이라는 지역의 문제에. 내가 무슨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어떤 불씨를 전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고. 안된다고 지레 겁먹고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 같아. 물론 이런 말은 감상주의적이긴 해. 직접적으로 중국 정부를 개인 차원에서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 한 개인들의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보다 체계적이고, 스마트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지.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닐까. 싶어. 


 최근에 북한에서 탈북한 모녀가, 굶주림으로 죽었다는 기사가 났어. 삼촌은, 너무 슬펐어. 오늘도 버려지는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먹을 것의 1/10은 될 나라에서 여전히 누군가 굶어 죽는다는 것이. 그리고 그게 자유를 찾아 떠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왜 그들에게 누군가 먼저 물어보지 않았을까. 주위의 사람을 탓하고 싶진 않아. 다만, 다만 다시 더 생각하게 되었어. 이 가을에, 온갖 풍요로움의 서사가 가득 깃든 시절에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무심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쓰고 나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삼촌도 잘 모르겠네. 사실, 글쓰기에 자신이 없어져서 지난 2년여간 편지를 쓰지 못했던 것이기도 한데. 그렇게 글을 쓰지 않은 채 지나니 옛 편지보다 더 못한 글이 된 것 같아 많이 부끄럽네. 앞으로 글쓰기나 어떤 일에 관심이 가거든, 삼촌의 이 편지를 반면교사로 삼길 바래. 사람은 꾸준히 무언가를 시도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로.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사람은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하나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눈 것이 돌아올 것이라는 도덕책 속 이야기는 하고 싶진 않아. 안 그럴 수 있거든. 적어도 삼촌이 아는 한 인류는 너희들이 다 자라는 그 시점까지도 완전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존재로 발전하지는 못할 거야. 서로를 삥 뜯고, 사기 치고 죽여버리는 존재로 보는 단계에서 벗어나기에는 아직 너무 많은 난관이 있거든. 종교, 민족, 자본... 하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가을에는. 나눠주지 않더라도. 내 안에 무언가 가득한 그 마법의 계절에는 먼저 이야기를 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그것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겁먹지 말고 시도하는 게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야. 


재미없는 말이 너무 길었네.

다음 편지는 더 빨리, 그리고 가능한 더 재미있는 글을 써보도록 노력할게.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2019.08.22 

삼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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