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2
봄날을 처음 맞이할 조카에게.
봄이 왔어. 얼음은 녹았고, 쌀쌀한 바람엔 그래도, 따뜻한 햇살이 녹아 있단다. 봄은 시작이지. 새싹이 트는 계절이니까. 새싹 속에는, 세상이 있단다. 숲을 맨 손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우리는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으면 된단다. 봄은 씨앗에서 새싹이 나는 나날들이야. 우리보다 작은 아이들이 옮긴 것들이 자라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건 모두 봄에서 시작된 일이지.
네 아버지와 네가, 함께 손잡고 - 형수님도 함께 꽃놀이를 갈 날이 몇 해 남지 않았겠단 생각이 드니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내가 태어난 그 여름날에는 떠올려 볼 수가 없었지. 하루 갈수록 커가는 네게, 100일 선물이라며 던진 글이 떠올랐어. 오늘 날씨를 확인하면서.
오늘은 2017년의 3월, 스물몇 번째 날이야. 거리는 풀린 날씨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가득해. 풀린 건, 그런데 날씨 만은 아니었어. 지난번 편지에서 썼던 일이 정리가 되고 있거든, 이 땅 한국에서는.
처음에는 그 편지 이후 또 많은 시간이 지나서 네가 기억하지 못할 세상을 한번 기록해볼까 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좀 들었어. 나는 네가 정말 '멋대로' 살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그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생겨 버렸거든. 약속 같은 거지. 그 말을 전해 주고 싶어서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어.
그 약속은 해가 뜨고 질수록 바래지 않고 더 빛이 나는 그런 거야.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정의(Justice, 이하 J)'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게. '정의(J)' 란 것은 무서운 말이야. 왜냐면 모두에게 다르거든. 정의가 다른 한자어로 'Definition' 이자 'Justice'인 것이 너무나 신기해. 난 그 두 가지가 그렇게 다르단 생각이 들지 않거든. 정의(J) 란, 누군가가 이게 옳다고 정의(Definition, 이하 D) 한 것이야. 정의(D)이란, 그 단어의 구성에 나오듯 '한계(finite)'를 짓는 것이지. 선을 긋는 거야. 삼촌은, 정의(J)란 상한선과 하한선의 문제라고 생각해. 그것을 어떻게 정의(D)하느냐.
문제는 그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거지. 그래서 정치는, 정의(J)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의(J)를 꺼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한 거라고 생각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정의(D)해야 하지만, 그것이 '정의(J)'라고 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 사람을 짓밟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정치란, 내 정의(J) 안으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지, 내 정의(J) 밖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삼촌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의 대사가 떠나지 않을 때도 분명히 있어. '강호의 도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도의와 정의(J)는 개념적으로는 다를 수도 있지만, 뭐 사실 크게 구분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 이사카 코타로의 <피시 스토리>에 나온 것처럼, '정의(J)가 이긴 적이 별로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
유발 하라리라는 사람이 그러더라. 사회집단은 '공동의 상상'으로 이뤄진다고. 그러니, 권력은 우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고, 정의(J)는 응당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다수가. 때문에 그것은 생각보다 자주 변하지. 우리가 인간을 정의(D) 내리고,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정의(J)' 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란다.
그런데, 그럼에도 가끔 그런 일이 벌어져. 그 정의(J)를 벗어난 반동들이 있는 거지. 왜 그러면 안되는데?라고 생각해서일까? 모르겠어. '현대판 노예'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모두가 따라야 할 '정의(J)' 가 무너졌다고 느껴서일 거야. 응, 그런데 이게 당연한 것들이라 정의(J)가 이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가 생각보다 많거든. 뭐냐면, 우리가 아직 '정의(D)' 내리지 못한 '정의(J)'들이 있어.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것들이 있어. 그리고 이런 정의(J)들은 단기적으로는 모두, 이겨 본 적이 거의 없어.
'정의(J)'를 '정의(D)' 하는 것은 과학적인 발견에 가깝다고 생각해. 어떤 원리 원칙에 따라 사회 현상을 보다 보니, 아, 이건 아니구나 하는 순간이 나오고. 그래서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하지. 그러니 '지구가 움직인 다는 것'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공시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거야. 당연한 건데도 말이야. 그래서 이런 순간들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있어 보이게 말하기도 해. 그러니까, 이런 싸움은 - 정의(J)가 수십수백 년간을 버텨 내야 이기는 거거든.
그래서 이 싸움은 힘들고, 지루해. 그리고 현대 사회에 와서는 더 힘들어. 정의(D)될만한 '정의(J)' 들은 거의 끝난 것 같거든. 새로운 것들은 너무 급진적이거나, 너무 어렵거나 혹은 너무 지엽적인 것이라고 생각되곤 해. 그런데, 그래도 그중에서 몇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나타나기도 해.
그중 하나가 수개월 전 쓴 첫 번째 편지에 묘사한 일을 만들었지. 사람들이 여기까지 가서는 안된다고 소리치기 시작했어. 영화 <금발이 너무해 2>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 미용실에 가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더니,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더라. 너무 화가 났는데, 생각해보니 처음에 내 머리에 이상한 가위 지를 할 때부터 나는 말했어야 했다. 라며. 소리를 높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Speak UP) 내가 이 장면을 본 게 한참 전인데 이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약간 벅찼어. 삼촌은 이제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음.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일하며 결국 국정농단으로 이어져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국회에서 탄핵결의안이 통과되고 2017년 3월 헌법재판 사고 최종 주문을 내리며 파면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정의(J)'는 승리했다고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동화책이 아니란다. 그게 '정의(J)'라고 말하기까지는 아직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장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에는 탄핵이 잘못되었다며 모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적어도 보편타당한 정의이긴 하지만 단 하나뿐인 정의(J)가 되기에는 -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까지 가기에는 아직 멀었지.
이 승리의 원인 분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아직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 있어. 정의(J)를 바로 세우는 것은 불의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의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끝이거든. 이제 우리는 그 작업을 하고 있어. 그래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그 방법에 있어서 같이 싸운 동지가 적이 되기도 해. 왜냐면 공동의 정의(J)를 이루었으니까, 이제 각자 다른 정의(J)를 가지고 경쟁을 하는 거지. 우리가 다음에 발견해서 지켜나가야 할 정의(J)는 이거라고, 그것을 위한 방법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
맞아. 2017년의 봄에 대한민국은 '선거'를 치르게 되었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파면으로 말이야. 여러 가지 정의(J or D)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어. 그중 뭐가 옳은 것인지 삼촌은 잘 모르겠어.
봄이 왔단다, 정말.
벚꽃이 피기 전. 따뜻한 햇살보다는 사람들의 글귀에, 노래 가락에 묻혀 왔단다.
봄은 씨앗이고, 씨앗은 숲을, 산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지. 그건, 가능성이라고 불린단다. 되게 멋없게 이야기하면 그런 거야.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유기물에서 시작해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 가능성에 수십억 년의 시간을 곱하면 딱히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 계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순간은 때론 영원을 지배해. 그런 때들이 있어. 2014년 4월의 어느 날은 그런 순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이 그 순간이 영원처럼 다가왔을 거야. 그리고 수년간 그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고.
마음은 낮밤따라 바뀌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오래, 우리를 움직인단다. 그 움직임이 커지고 커져 마침내.
삼촌은 약간 울컥했어, 봄에. 2017년 스물아홉 번째 맞이하는 특별할 것도 없는 봄날에.
정의는 여전히 승리한 적이 없는 세상에. 해결된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밤에.
배 한 척이 올라왔어. 바다 위로.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어떤 일을 볼 때는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가끔 그런 태도가 선택을 어렵게 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정의(J)를 정의(D)하는 것이 너무도 독선적이게 되거든. 모두가 공유하는 정의(J)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말하고, 또 들어야만 해.
인양하는데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을 하는 게 옳은 일일까. 적어도, 이 땅에서는 그게 모두의 바람에 가까운 것이 될 순 없을까. 그런 이야기들이 1000일 동안, 있어왔어. 그 천일동안 말이야. 아마도 이런 말싸움은 네가 학교를 들어가고, 졸업을 하고 돈을 버는 그때에도 계속될 거야. 무엇이 정의인지 찾아야만 하니까.
우리가 수백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결심을 한 것이 꼭 완전무결한 정의(J)라고 말하는 건 아냐. 다만 우리는 그것을 찾는 오랜 과정을 걸쳐서 마침내 봄을 맞이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봄은 겨울을 버텨낸 씨앗에게 오는 축제야. 칼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서야 마침내, 봄은 온단다.
이제, 네가 막 옹알이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야 해. 봄은 왔고, 씨앗들은 저마다 싹을 틔우기 위해 밭을 찾아 떠돌고 있어. 어느 밭에, 어느 씨앗을 심어야 할지 우리는 말하기 시작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 수백 수천일을 고민해온 사람들이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지.
아마도, 이번 선택은 1987년 이후의 첫 개헌까지 이어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헌법이란 우리가 공유하기로 결의한 '정의(J)'야. 1987년의 봄에 우리는, '행복추구권'이나 '직선제' 라거나 하는 씨앗을 이 밭에 심을 수 있었어.
그 씨앗들은, 오랜 겨울을 버텨낸 것들이야. 지금 보다도 더 추운 겨울을 말이야. 정의(J)란 그래서, 추운 겨울 속에서도 강한 이들이 원하는 대로 정의(D)된 것들을 버텨낸 자들의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어. 응, 준비된 자들의 것이지.
지난번 편지에 썼던 2016년 겨울의 광장에, 사람들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직접 청소를 하기도 했단다. 사람들이 턱에 걸려 넘어질까 봐 여기 턱이 있어요!라고 한 시간 가까이 외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해. 경찰 버스로 올라간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있었지. 김밥을 싸와 나누던 사람도 있었어.
삼촌이 생각하는 준비된 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물론, 수백 수천일 공부하고 고민해서 더 나은 '정의'를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씨앗을 준비해야지.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밭을 갈던 사람들의 몫이야. 그래서 밭을 갈던 사람과, 씨앗을 지켜낸 사람들은 마침내 만나게 될 거야.
봄이 왔으니까.
봄은 무더운 여름으로, 내가 태어난 그 계절로 돌아가겠지. 낙엽이지는 계절은 바로 또 찾아오고 다시 동장군이 찾아오게 될 거야.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싸울 거야.
아마 학교에서, 사회에서 너도 어떤 때는 되게 사소한 이유로, 가끔은 진지하게 어떨 때는 정말 저 사람이 미워 죽이고 싶을 만큼의 마음을 가지고 싸울 거야, 분명히.
봄날은 짧아. 그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란다. 벚꽃이 피고 지고, 계절은 돌고 돌아야 해. 그 흐름 속에서 씨앗을 지켜낼 것인지, 밭을 갈 것인지는 모두의 선택에 달린 것이지. 네가 무슨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어.
한 가지.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봄날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날에, 오늘도 춥겠지 하며 패딩 점퍼를 입고 나간 그 날에 찾아와. 그전까지 계속 추우니 불씨를 지켜내며 밤을 지새워야 하겠지만, 바람이 잦아들면 어느 들판에 쟁기를 들고나갈지를 머릿속에 계속 그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바라는 봄날이 어떤 모습일지. 빨간 꽃, 파란 꽃. 어떤 꽃을 피워내고 싶은지. 봄날이 오기 전 아주 추운 겨울을 지새우면서도 따뜻한 그 날을 잊지 말고 기억해 내어 계속 고민해야만 해. 그건, 진짜 힘든 일이 될 거야. 누군가는 낙관주의에 대해 비관하겠지. 누군가는 이상주의적이라며 비난을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불가능한 꿈을 꾸며 현실을 이겨내야만 해.
그리고 봄날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단다. 내가 상상한 봄날이 왔을 때. 그것을 온전히 맞아들이고 그것이 끝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순간이 영원을 지배할 수 있도록 눈으로, 귓가로 받아들여야 해. 그렇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 삼촌은.
봄날. 개울물이 차오르고. 새들은 지저귈 거야. 봄은 끝이야. 꽃이 지는 계절이 될 테니까. 꽃봉오리들이 봄에, 여름에 떨어지며 흔적을 남길 거야. 벌들은 그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지는 꽃잎에 슬퍼할 틈이 없이 집을 짓겠지. 봄은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보이는 바람 소리야. 큰 나무가 쓰러지고, 풀들이 말라 가는 것들도 모두 봄이 시작되면서 예정된 일들이지.
봄날이 끝날 때에, 씨앗을 지켜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삼촌은.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단 생각에 편지를 써 보았어.
2017.03.26
삼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