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in Oct 11. 2016

사람에 관하여

술에 취한 김에 쓰는 인간 찬가

나는 사람을 싫어해 왔었다. 그런 생각의 밑에는 내가 수년간 주장해오는 '병신 개새끼론' 이 있었다. 요 개똥철학을 요약하면, 사람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새끼고, 그것을 뛰어넘었을 때, 그게 또 과연 잘한 일인가 따져보면 대체로 병신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딜레마적 문제 인식이다. 


사실 이 생각의 기저에는 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나는 당최 나를 믿을 수 없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참을성이란 찾아볼 수 없고.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친일파요, 군부 독재 시절에 태어났으면 비겁자로 살아갔을 내 멘탈리티를 나름대로 관조하고 있자면, 나에 대한 혐오가 사람에 대한 혐오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람다움이라는 것은 상상의 영역이지 않은가. 우리는 동물적으로 우리가 살 길을 찾아가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닌가. 이제야 한국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인권만 봐도 그렇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격을 지속할 수 있는 권리. 인격이란 무엇인가, 사람답게 사는 것. 그렇다면 사람다운 것은 무엇일까.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그건 우리가 공통으로 상상하는 '천부인권'에 가까운 것이다. 상상의 산물인 거지.


그런 와중에 내가 겪은 사회를 돌아보면, 진짜로 개새끼들이 많았다. 이건 비하나 욕설의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기준에서는.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할 지라도, 본인의 생존을 위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면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이니까. 


이런 와중에도 사람은 인권 말고 다른 것들도 발전시켜 왔다. 자의식,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감정은 다른 생명체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동물로 사람을 발전시켜왔고,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면서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건, 자살로도 이어지고 희생으로도 이어진다. 후자의 경우 근연도 높은 DNA 개체를 더 많이 남기고자 하는 세포단위의 의지의 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생에 의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가 희생을 한다는 것은 더 나와 가까운 자손을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자연적인 의지와는 그 위상이 다른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시스템'을 계속해서 만들어왔다. 수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서 여전히 100% 알 수가 없다.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 몇 가지 룰을 정해서 이해하기 쉬운 모형을 만들어 수식으로 검증은 하고 있지만, 생에 의지 조차 뛰어넘어서 진화하고 있는 사람의 자유의지 속에서 거대한 시스템은 한 개인이 인식하기에는 어려운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경제 정책이란 대개 실패하기 마련인 사회가 되었고.


그러니 이 거대한 시스템에 짓눌려 개인은 말살되고, 생에 의지를 포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 자체를 뛰어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며 지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 안의 내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느 동물이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종 중에서 본인과 세상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피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릭스. 우리는 심지어 이 세상의 존재 자체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경지의 지적 소양을 갖추었다. 빨간약과 파란 약이라는 선택지 조차 다른 이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 문제의 심각성과, 그에 수반하는 선택의 고통은 충분히 힘든 것이지만 그것조차도 감내하고 계속해서 살아가고, 끊임없이 세상에 본인의 이름을 세기면서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인간들. 처절하고, 구슬프지만 또한 아름답다.


어쨌든 이 시스템 속에서 일렬도 나래비 새워 본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붓다나 에수, 공자 같은 선각자들도 고통받았었고, 일생의 구도 끝에 구원과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장삼이사들이야 그걸 얻을 가능성은 요원하고. 종교에서 그 위안을 얻는 것은 모르핀을 맞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게 시스템의 윗단에서 내려온 교묘한 술책일 순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을 내가 미워했었다니! 반성의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온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을 사람 전체로 키워서 스스로의 위안을 삼으려 했다니. 정말 개새끼 같은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찾아가고,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우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늘도 세상살이가 즐겁다. 재미가 없을 리가 있나. 이렇게까지 모두가 주연으로 영화를 찍고 있는데. 눈이 부셔서 예전에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각자의 아름다움을. 그것이 오늘은 좀 머릿속을 맴돌아 글로 남겨 본다. 모두들, 수고가 많고 아름다우시다. 아마 앞으로도 힘든 일들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런 삶 속에서도 광명을 찾아, 행복을 만들어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두의 건승을 기원하며.



2016. 10.11 

매거진의 이전글 그 해,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