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in Jul 20. 2019

반성문

190223의 단상 + 190720의 단상

반성문은 반성하는 글이다. 글이란 무엇인가는 너무 방대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반성이란 무엇인가? 한자를 파자하거나 풀이하는 것, 지식백과를 빌려 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떠오르는 그대로 서술해보자. 되돌아보는 생각이다. 반대로 하는 생각이다. 왜 반대로 생각하는가, 왜 되돌아보는가?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성문은 '왜'를 규정하는 글이다. 왜 잘못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행위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외생변수라면? 그것은 반성문으로 표현해야 하는 영역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고에 대한 분석에 대한 글 정도면 괜찮겠지만. 그러니 반성문의 영역은 철저하게 '나' 그러니까 글 쓰는 이의  행동에 대한 것이다. 


반성문에는 다른 전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그것은 일어난 사건은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것 하나이다. 즉, 반성문의 대상이 되는 사건은 '글 쓰는 이'가 마음을 먹는다면 바꿀 수 있는 영역의 것이 되어야 한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었다고 반성문을 쓰진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해버린 일에 대한 글이 반성문이다. 


그럼 그런 일들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당연히 물리학 법칙, 생물학 법칙에 반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반성문은 상징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회학이 연구해야 하는 영역임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 - 즉 우리의 규범 체계 속에서 정해진 터부, 금기 같은 일에 대해서 그것을 했지만, 그것을 후회하고 다신 하지 않겠다는 글이 반성문이 된다. 


그렇기에 대중들이 유명인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규범이란 다수의 것이니까. 대체로. 엘리트가 만들어낸 논리 구조속의 합리성이 매우 고귀하더라도, 어쨌든 규범은 다수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천동설을 주장한들, 실제로는 지구가 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럼 왜 어떤 이들은 반성문을 써야만 했는가. 아니, 반성 동영상을 올려야만 했는가, 생각을 해본다. 일본 여행에 대한 콘텐츠를 올렸기 때문이다. 왜? 요즘엔 일본을 좋아해서는 안된다. 왜? 그들은 우리를 침략했었고, 지금은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 1. 일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2.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진다. 3.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우리를 침략한 과거의 일제에 대한 기억을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일본이 현대의 일본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더하여, 분노 만으로는 양국 더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우리가 야만 시절로 돌아가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다른 것도 더 약탈하자 마인드로 일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양자 간의 협상, 타협, 협정의 영역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그 조선의 후계자인가. 일단 우리는 침략당한 조선의 후계이긴 하지만 조선인은 아니다. 대한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지는 않았으니까. 근대 이후로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의 후예라는 전통을 가지고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우리는 우리 반도를 떠난 이들에게 무심하다. 그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고, 독립 때 우리를 지원한 이들도 많은데도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속인주의가 아니라 속지주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속인주의, 우리는 우리 안에 스며드는 다른 민족에 대해서 충분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하게 경계하고 있다. 음,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될까? 21세기의 민족주의는 세계에, 아니 정말 민족주의적으로 한민족에게 도움이 될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 다 예스를 한다고 해도. 대중에게 심판의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선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대의제 민주정의 근간은 이건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 근본적으로 뒤엎어버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왕권신수설처럼, 권력에 정당성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라는 점에 있으며 혁명 대신에 5년(혹은 다른 년도마다) 이뤄지는 선거와 정부의 가상 전복을 통해서 그것을 기념하게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심판의 권위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우리는 모두 심판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을 정부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민재판을 계속할 것이라면 - 그러면서 정치인들에게 힘을 쏟는 것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근대적인 국가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결국, 특정 유명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우리가 무정부주의를 달성할 만큼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전파가 널리 되었으며 집단 체제에 대한 불신이 끝으로 가고 있다는 방증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민족주의라는 도화선을 타고 격발 된 것이라면?



매거진의 이전글 평면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