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INFP야"- 관계를 향한 절실한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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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나는 INFP야"라는 고백 - 관계를 향한 절실한 손짓


MBTI가 이토록 매혹적인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나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너에게 나를 설명하고 싶은 욕망의 언어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INFP야"라고 말할 때,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나를 이해해줘" "내 서투름을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말아줘" "네가 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을 갈망하면서, 정작 그 연결의 도구로 '고정된 유형'이라는 칸막이를 세운다. 16개의 서랍장에 나를 넣고, 너를 넣고, 그 서랍장의 라벨을 보며 "아, 우리는 잘 맞아" 혹은 "우리는 안 맞아"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서랍장 밖에서 일어난다.


진정성이라는 환상, 그리고 유동하는 나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것. 이 얼마나 근대적인 집착인가.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면 언젠가는 단단한 핵이 나올 것이라 믿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 가면들을 벗어던지면 '날것의 나'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MBTI는 이런 믿음에 과학적 포장지를 씌운다. "당신의 진짜 유형은 INTJ입니다"라는 진단은 마치 영혼의 DNA를 발견한 것 같은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이나 포스트모던 철학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듯, 고정된 자아란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있을 때의 나, 친구와 있을 때의 나, 부모님 앞에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 이 중 무엇이 '진짜'인가? 어쩌면 이 모든 나들이 동등하게 진짜이며, 동시에 동등하게 '만들어진' 것일지도.


진정성을 '평균값'이나 '최빈값'으로 찾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내가 가장 자주 보이는 모습이 진짜 나인가? 가장 편안할 때의 모습이 진짜인가? 이런 질문들은 마치 강물의 '진짜 모습'을 찾는 것과 같다. 강은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격렬하며, 때로는 얼어붙는다. 그 모든 것이 강이다.


"나를 완성하는 것은 너" -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나를 부른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나는 너의 시선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아기가 엄마의 눈빛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듯, 우리는 평생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또 재발견한다.


MBTI가 놓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MBTI는 나를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개체로 상정한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조차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나의 외향성을 끌어내고, 어떤 사람은 나를 동굴 속으로 숨게 만든다.


더 나아가, 너와의 만남은 단순히 나의 '숨겨진 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를 창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내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나 놀라고, 경쟁자를 만나 내 안의 투쟁심을 발견하고, 아이를 만나 내 안의 어린아이를 재발견한다. 이것은 원래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인가, 아니면 관계가 창조한 것인가? 아마 그 구분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MBTI를 넘어서 - 열린 지도로서의 성격


그렇다면 MBTI는 무용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MBTI를 '나의 정체성'이 아닌 '대화의 출발점'으로, '고정된 진단'이 아닌 '유동하는 스케치'로, '분류의 도구'가 아닌 '이해의 초대장'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INFP인데..."라고 시작하는 대화가 "그래서 나는 이럴 수밖에 없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너와 있을 때는 다른 내가 되기도 해"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일까?"라는 물음으로 열린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것도, 너를 아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되어가는'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MBTI든 어떤 도구든, 그것이 만남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쓰인다면 의미가 있고, 만남을 제한하는 벽이 된다면 버려야 한다.


나는 너를 통해 나가 되고, 너는 나를 통해 너가 된다


우리의 대화는 이제 완전히 다른 지평에 도달했다. MBTI는 Nature vs Nurture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대적 물음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되어가는가"라는 관계적 물음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타고나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는 '함께-되어감(becoming-together)'의 존재들이다. 내 성격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너와 나 사이에서 창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자기이해란, 나를 완성하는 것이 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정한 관계란, 서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용기를 갖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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