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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동기들, 동료들은 너무 뛰어나 보였다. 지금도 그렇고. "나는 충분한가?" "나는 속하는가?"—이 질문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소속감에 집착했다. 친구 집단, 동아리, 학교 이름. 그게 나를 증명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저기 속한 사람이니까,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다가, 현실과 부딪히면 다시 "역시 안 돼"로 추락했다. 그 진폭이 더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소속감이 아니라 나만의 엣지를 가져라"고 조언했다.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속하는가?"라는 질문이 부정적일 때, "나는 특별한가?"를 고민하는 건 사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먼저 어디엔가 속하고, 그 다음에 특별해지고 싶었다. 순서가 있었다.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같은 회의에 12분 늦게 들어온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명은 팀의 시니어 직원이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적응 중인 신입이다. 상사가 똑같이 "왔구나!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라고 농담을 던진다.
시니어는 웃으며 교통 체증이나 아이 등교 문제를 설명하고,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하지만 신입은 다르다. 동료 몇 명이 웃는 소리가 들리고, 대화는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마음속에서는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 "상사의 말투에 비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접속하기 전에 나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여기 어울리는 사람이 맞을까?"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채팅창에서 내부자 농담이 오가지만 신입은 이해하지 못한다. 발언 중 동료가 눈을 굴리는 것처럼 보인다. 상사가 회의 내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하다. 회의가 끝날 즈음에는 업무 의욕이 크게 줄어들고, "내가 뭘 확인해야 했지?"라는 의문만 남는다. 그리고 회의 후 눈을 굴린 동료에게서 "괜찮아? 회의 때 좀 집중을 못 한 것 같았어"라는 메시지가 온다. 답장을 하지 않지만, 머릿속은 다양한 답변 시나리오로 가득 찬다.
나는 그 신입이었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는 속하지 않는다", "나는 부족하다"는 증거로 연결되고, 그 생각이 꼬리를 물며 현실을 왜곡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한 현실 속에서 나는 실제로 실수를 했고, 그 실수는 다시 "역시 나는 안 돼"라는 확신을 굳혔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모델이 있다. 핵심 질문, 해석, 석회화—세 단계로 이루어진 나선형 구조다.
첫 번째는 핵심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속하는가?", "나는 충분한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늘 우리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평소에는 잠잠하지만, 중요한 전환점에서 다시 떠올라 불안과 집착을 일으킨다. 나의 경우, 이 질문들은 이미 부정적인 답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아니, 부족해. 동료들을 봐." "잘 모르겠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이 OS에 버그가 있을 때, "차별화된 강점을 개발하라"는 조언은 추가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 OS가 불안정한데 앱을 깔아봤자 계속 오류가 난다.
두 번째는 해석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머릿속에 이미 있는 정보와 믿음을 바탕으로 해석한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주제만 집중하고, 다른 신호는 걸러낸다. 숲속에서 호랑이가 있다고 믿으면 작은 소리도 모두 호랑이로 해석하는 것처럼, 내가 "나는 속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때는 모든 사소한 신호가 그 증거로 보인다.
동아리에서 내 의견이 채택되지 않으면 "내 생각은 가치가 없구나"로 해석했다. 친구들이 나를 빼고 만나면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구나"로 받아들였다. 근자감으로 덤볐다가 실패하면 "역시 내 능력은 여기까지구나"로 결론 내렸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사소한 단서도 기존 불안을 강화하는 증거로만 읽어냈다.
세 번째는 석회화다. 부정적 생각과 감정이 고착화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더 굳어진다. 데이트가 잘 안 됐을 때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 다음 만남도 실패로 이어진다. 시험에 실패하고 "나는 못한다"고 생각하면, 수업을 포기하게 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기 서사가 굳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속감에 더 집착했다. 친구 집단, 동아리, 학교 이름—이런 외부의 라벨이 나를 증명해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핵심 질문의 부정적 답을 가리는 것일 뿐, 바꾸는 게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그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 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컴퓨터, 인터넷. 이건 "소속"을 증명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좋아했다. 재미있었다. 10년째 하고 있다. 그 결정이 "잘되었다" 또는 "안되었다"를 떠나서, 나는 이걸 즐기고 있다.
왜 이게 달랐을까? 이제는 안다. 해석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나는 부족해"가 아니라 "아, 이 부분을 더 배워야겠네"로 읽어냈다. 잘 안 될 때 "나는 이 일에 재능이 없어"가 아니라 "이 방법은 안 통하는구나.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 내게 다른 해석을 열어줬다. "네가 이걸 좋아한다는 게 보여." "이 부분은 네가 확실히 잘하더라." "실수해도 괜찮아. 다음에 다르게 해보면 돼." 이런 신호들이 반복되자, 나는 비로소 "나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아직은 아니지만, 성장 중이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전환점이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런 순간을 "지혜로운 개입"이라고 부른다. 부정적 나선과 긍정적 나선 사이 양갈래 길에서, 더 나은 사고 방식을 제안하는 작은 계기 말이다. 단 21분 개입으로 1년 뒤 부부 관계가 개선되고, 한 장의 편지가 청소년을 범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엽서 발송만으로 2년간 자살률이 절반으로 낮아진다. 대학 신입생의 1시간 소속감 성찰이 10년 뒤 삶의 만족도와 성공을 높인다. 누군가는 이를 "평범한 마법"이라 불렀다.
최근에 나는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잃은 팀원을 보았다. 그 눈빛에서 20대의 나를 보았다. "나는 이 일에 재능이 없나봐", "나는 이 팀에 필요 없나봐"—그 자동 해석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사람은 혼자서는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나도 해봤으니까. "네 엣지를 찾아라"고 조언해도 안 통한다. 소속이 불안정할 때 차별화는 사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해석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건 네 능력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프로세스를 명확히 안 해준 거야." 이렇게 말하면 해석의 방향이 바뀐다. "네 기여 덕분에 우리가 이걸 놓치지 않았어. 구체적으로 말하면..."이라고 하면 소속의 신호를 보낸다.
"나도 이 부분은 잘 몰라. 같이 배워보자"고 하면 의도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완벽해야만 속할 수 있는 건 아니야"라는 메시지다.
이건 립서비스가 아니다.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신호다. 그 사람이 스스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빠져나올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충분한가?", "나는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불안해진다. 지금도 동료들이 뛰어나 보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 불안을 "나는 부족해"라는 자동 해석으로 굳히지 않는다. "아직 배우는 중이다", "이 부분은 개선할 수 있다", "이건 타이밍 문제였다"—이렇게 다른 렌즈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게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명확한 신호를 보내줬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줬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될 차례다. 리더나 매니저가 아니어도 괜찮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멘토로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너는 속해 있고, 너는 충분하고, 너는 성장 중이다"라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그건 거창한 게 아니다. 명확하게 기여를 인정하는 것, 실수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는 것, "나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을 보이는 것. 그게 쌓이면, 개인의 노력과 맞물려, 부정적 나선은 긍정적 나선으로 바뀐다.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그게 누군가를,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