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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신촌

365 Proejct (354/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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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살던 시절 (2006~2014)


나는 2000년대 중반 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신촌에 살았다. (실제 거주하기도, 혹은 학업의 장소이기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대학가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시기의 신촌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약속 장소를 굳이 정할 필요도 없었다. "현백 앞", "빨간 잠망경", 아니면 "맥날 앞". 그곳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가 있었고, 밤이 되면 거대한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뤘다. 신촌은 낡았지만 활력이 넘쳤고, 시끄러웠지만 그것이 곧 청춘의 소음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최근 마주한 신촌의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만남의 광장이었던 맥도날드는 사라졌고, 18년을 버틴 롯데리아도 문을 닫았다. 대로변 건물들이 통째로 비어 '임대 문의' 종이만 나부끼는 유령 도시. 나의 20대가 서려 있는 공간이,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나 정신적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2. 상권의 1차 법칙이 무너진 시대


전통적인 상권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지(Location)'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 교통 요충지, 대학가 앞. 이 공식은 수십 년간 절대적이었다. 신촌은 그 공식의 완벽한 수혜자였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가 삼각 편대를 이루고, 2호선이 관통하며, 주변 주거 인구까지 탄탄했다.


하지만 지금 신촌의 공실률이 증명하는 것은 명확하다. 입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입지의 정의가 바뀌었다. 과거의 입지가 '물리적 접근성'이었다면, 현재의 입지는 '경험적 도달성'이다. 성수동은 지하철 2호선 끝자락이지만, 2024년 가장 핫한 상권이다. 을지로는 낡고 비좁지만, 청년들이 몰린다. 왜? 거기에는 '가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신촌에는 물리적으로 갈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 갈 이유가 사라졌다.


3. 예언서가 된 노래 가사, "신촌은 뭔가 부족해"


돌이켜보면 징조는 이미 있었다. 2011년, UV가 발표한 노래 <이태원 프리덤>의 가사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었다.


"신촌은 뭔가 부족해."


이 한 줄이 상권의 운명을 예고했다. 어쩌면 신촌의 몰락은 그 가사가 나온 시점에 이미 확정된 미래였을지 모른다.


상권의 생명력은 '차별성'에서 나온다. 강남은 명품과 부의 과시, 이태원은 이국적인 다양성, 홍대는 인디 문화와 젊음의 실험성. 그렇다면 신촌은? "대학생이 많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었나?


신촌은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지 대학생이라는 '안정적인 수요'를 공급받는 구조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수요가 사라지자, 상권은 맥없이 무너졌다.


4. 공급 체인의 붕괴: 1학년이 사라진 날


2010년, 연세대가 1학년을 송도 국제캠퍼스로 보낸 결정은 상권 관점에서 보면 '주요 공급선의 단절'이었다.

상권은 생태계다. 특히 대학가 상권은 학년별로 역할이 다르다:


1~2학년: 비이성적 소비층. 시간도 많고, 아직 취업 압박이 덜하며, 신입생 특유의 들뜬 분위기로 술집, 카페, 놀이 공간에 돈을 쓴다.

3~4학년: 합리적 소비층. 스펙 쌓기와 취업 준비로 시간이 없고, 지출을 줄인다. 도서관과 고시원이 주 활동 반경.


신촌은 1~2학년이라는 '고회전 고수익 고객층'을 잃었다. 남은 것은 가성비를 따지는 고학년과, 최소한의 끼니만 해결하는 고시생들. 상권의 엔진이 꺼진 것이다.


여기서 상권의 2차 붕괴가 시작된다. 매출이 떨어지니 임대료를 감당 못한 독립 점포들이 떠나고, 프랜차이즈만 남는다. 프랜차이즈는 효율성은 있지만 '문화'를 만들지 못한다. 문화가 사라지니 더 이상 '놀러 갈 이유'가 없어진다. 악순환의 고리.


5. 소비 패턴의 대전환: 집단에서 개인으로


지난 20년간 소비자의 행동 양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의 소비:

모여야 놀 수 있다 (PC방, 당구장, 술집)

약속 장소가 필요하다 (현백 앞, 맥날 앞)

소비는 '장소 기반'


2020년대의 소비:

혼자서도 놀 수 있다 (스마트폰, OTT, 게임)

약속은 카톡으로 실시간 조정

소비는 '취향 기반'


신촌은 '모임의 거점'으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만남의 방식을 바꾸고, 코로나가 대면의 필요성을 줄이고, MZ세대가 혼술·혼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신촌식 대형 술집 중심의 상권 구조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게다가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여유가 없다. 소위 '영포티(Young Forty)'로 불리는 우리 세대가 누렸던, 다소 헐렁하고 낭만적이었던 대학 생활은 끝났다. 등록금과 주거비는 치솟았고, 학생들의 소비력은 줄어들었다. 술을 덜 마시는 문화, 더치페이의 일상화, 취업을 위한 스펙 경쟁 속에서 '대학가 대형 술집'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6. 자본은 '안정'에서 '실험'으로 흐른다


결국 이것은 "돈과 욕망이 어디로 흐르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의 상권 논리:

안정적 수요 → 프랜차이즈 대형 점포 → 장기 임대 → 낮은 리스크


현재의 상권 논리:

유동적 트렌드 → 독립 브랜드/팝업 → 단기 임대 → 높은 회전율


과거의 돈은 '학교 앞'으로 흘렀다. 그곳엔 매일 5만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돈은 '확실한 경험'을 주는 곳으로 흐른다.


성수동의 팝업 스토어는 한 달 단위로 바뀐다. 한남동의 감각적인 카페는 SNS로 입소문을 탄다. 을지로의 힙한 골목은 '아는 사람만 아는' 희소성을 팔아먹는다. 젊은 층은 이제 학교 앞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을 확인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


프랜차이즈만 가득한 신촌은 그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신촌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만 있다. 하지만 성수동에 가면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상권의 가치가 '규모의 경제'에서 '희소성의 경제'로 이동한 것이다.


7. 상권 이론의 재정립: Location에서 Content로


신촌의 공실은 단순한 불경기의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상권사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 서늘한 증거다.


종료된 패러다임: Location (입지) → Traffic (유동인구) → Revenue (매출)

새로운 패러다임: Content (콘텐츠) → Experience (경험) → SNS (확산) → Traffic (유입)


과거에는 좋은 입지가 유동인구를 만들고, 유동인구가 매출을 보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콘텐츠가 경험을 만들고, 경험이 SNS로 확산되고, 확산이 유입을 만든다. 입지는 이제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신촌은 입지는 여전히 훌륭하다. 하지만 콘텐츠가 없다. 경험할 것이 없다. SNS에 올릴 것이 없다. 그래서 유입이 없다.


에필로그: 역사가 된 풍경


나의 2006년 신촌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텅 빈 거리를 보며 씁쓸함을 삼키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떠났으며, 그 시절의 우리는 이제 그곳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은 단지 향수의 문제가 아니다. 신촌의 몰락은 한국의 모든 전통 상권에 던지는 경고다.

입지에 기대지 마라. 콘텐츠를 만들어라.


유동인구를 기다리지 마라. 경험을 설계하라.
과거의 영광을 붙들지 마라. 새로운 욕망을 읽어라.


신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부활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촌이 아닐 것이다. 전혀 다른 무언가로, 전혀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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