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008/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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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같은 회사'를 넘어,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기업에 대하여
미국 루이지애나의 전력장비 회사 '파이버본드'가 회사를 매각하며 전 직원에게 1인당 최대 6억 원이 넘는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처음엔 누구나 숫자에 압도된다. "대체 얼마나 벌었길래?"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가 우리를 뒤흔드는 진짜 이유는 액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근원적인 갈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회사와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함께 가는 사이여야 하는가?"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우리는 가족 같은 회사입니다"라는 말은 일종의 '경보음'처럼 들린다. 이 말이 호출되는 순간은 대개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다. 야근이 필요할 때, 임금을 동결해야 할 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때 '가족'이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반대로 회사가 잘나갈 때는 어떤가? 성과가 폭발하고 기업 가치가 수직 상승할 때, 그 '가족'의 울타리는 갑자기 주주와 오너 일가로 좁혀진다. 이익은 사유화되고, 고통만 '가족화'되는 모순이다.
파이버본드의 사례가 감동적인 이유는, 사장이 직원들을 진정한 '식구(食口, 함께 밥을 먹는 입)'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제가(齊家)'의 실현과도 같다.
가장(리더)이 밖에서 사냥을 성공했다면, 집안의 구성원들이 배불리 먹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말로 때우는 위로 대신, '현금'이라는 가장 확실한 자본주의의 언어로 존중을 증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단순히 가(家)에서 멈추지 않는다. 잘 다스려진 가는 국(國)으로, 다시 천하(天下)로 확장된다.
기업이라는 '가(家)'가 제대로 다스려진다는 것은, 그 안의 구성원들이 행복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기업이 사회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공(公)'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 가치를 만들었다"는 인정(Recognition)이며, 동시에 그 가치가 사회로 흘러가야 한다는 책임의 자각이다.
우리는 이와 정반대되는 장면들에 더 익숙하다. 대장동 사건이나 무수한 기업 횡령 사건들이 그렇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했다"는 명분 아래, 극소수의 내부자들끼리 천문학적인 이익을 독점한다.
법적인 유무죄를 떠나, 관계의 윤리로 볼 때 이것은 '운명 공동체'가 아니다. '폐쇄적 이익 카르텔'일 뿐이다.
고통은 사회화(Socialize)되고
위험은 외주화(Outsource)되며
보상은 사유화(Privatize)된다.
이 구조 속에서 회사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공적 도구(Public Tool)'가 아니라, 내부자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파이버본드의 사례가 단순한 미담을 넘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구조가 마치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주주 이익 극대화"는 기업의 유일한 목표처럼 가르쳐지고, "시장의 효율성"은 모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주문처럼 암송된다. 하지만 이 또한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오직 이윤 극대화"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업은 좀 더 복합적인 사회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불과 50년 전의 일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주식회사라는 형태 자체가 불과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발명품에 불과하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위험을 분산하고 자본을 모으기 위한 '도구'였지, 인간 조직의 유일하고 최선의 형태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도구를 목적 그 자체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부 구성원끼리 똘똘 뭉쳐 잘 나누기만 하면 완벽한 회사일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조직이 지나친 내부 결속에 빠지면, '마피아'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끼리는 좋잖아", "외부의 비판은 무시해"라는 온정주의가 싹트는 순간, 혁신은 멈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비판 없는 조직은 도태된다. 역설적이게도 주주나 시장(Market)의 차가운 감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부의 압박은 내부를 긴장시키고, 나태해지려는 본능을 깨운다.
진정한 이상적인 조직은 '따뜻한 분배'와 '차가운 혁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곳이다. 내부를 향해서는 관대하되, 스스로를 향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는 것. 쉽지 않은 균형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초회사(Über-Company)'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이 기존의 관습과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라면, '초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초회사'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회사가 아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는 회사주주의 이익 극대화라는 지상 과제에 휘둘리지 않고, 기업 고유의 철학을 지키는 주체성.
안주하지 않는 회사내부의 안락함에 취해 '철밥통'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어제의 성공 방식을 스스로 파괴하며 나아가는 혁신성.
몽상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런 기업들은 이미 존재한다.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창업자 이본 쉬나드가 회사를 비영리 신탁에 기부하며 "지구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주주"라고 선언했다. 매년 수백억 원의 이익을 환경 보호에 쓰면서도, 품질과 혁신에서 업계를 선도한다. 내부 결속과 외부 기여, 이윤 추구와 가치 실현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사례다.
또한 'B-Corp(Benefit Corporation)' 인증을 받은 기업들은 법적으로 이윤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영향을 함께 추구할 의무를 진다. 이것은 선한 의도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정관과 지배구조 자체를 바꾸는 시도다. 전 세계 8,000개 이상의 기업이 이 길을 선택했다.
한국에도 협동조합이라는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형태가 있다. 1인 1표의 원칙, 이익의 공동 분배, 지역사회 기여를 핵심 가치로 하는 이 조직 형태는, "주주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논리로 작동한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구성원의 행복과 지속가능성 면에서는 오히려 앞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회사에서는 노사 관계의 공식도 바뀐다. 이익을 나눌 때 철저히 함께했다면, 위기의 순간 노동자가 먼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을 삭감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 마르크스적 이분법(자본 vs 노동)을 넘어, 진정한 운명 공동체로 진화한 조직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리더의 '수신(修身)'이다.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고, 회사를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 더 나아가 '사회의 것'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하지만 개인의 도덕성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상장사의 성과 지표에 '구성원 행복도', '임금 격차 비율', '지역사회 기여도'를 의무적으로 공시하게 만들 수 있다. 재무제표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적 대차대조표'를 공개하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이런 지표를 고려해 투자한다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다.
또는 이익 배분 구조를 법적으로 재설계할 수도 있다. 독일의 공동결정제(Mitbestimmung)처럼,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제도화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재무제표와 대시보드에는 지금 '매출'과 '이익'만 찍히고 있다. 만약 미래의 '초회사'라면, 그 대시보드에 '구성원에게 분배된 행복의 총량'*이나 '사회를 위해 기여한 가치의 크기'가 핵심 KPI로 떠 있지 않을까? 이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면, 100년 전 사람들에게 "주 5일 근무"나 "유급휴가"를 이야기했을 때의 반응을 떠올려보라.
6억 원이라는 숫자는 자극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돈이 지급된 배경에 깔린 '태도'다.
당신은 회사를 노동과 임금을 1:1로 교환하는 '거래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인생의 시간을 투자해 무언가를 함께 일궈내는 '터전'으로 만들 것인가?
정답은 없다. 깔끔한 거래 관계가 더 합리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꿈꿔볼 수 있다. 내가 기여한 땀을 기억해 주는 회사, 위기뿐만 아니라 환희의 순간에도 나를 '가족'이라 불러주는 자격이 있는 회사.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한때는 급진적이고 위험한 상상이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이들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던 이들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선동가로 낙인찍혔다. 8시간 노동제를 외치던 노동자들은 경제를 망칠 무리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옳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덕분에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
회사가 지금의 형태여야 한다는 천부적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가 이 모습으로 영원해야 한다는 우주적 법칙도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바꿀 수 있다. 새로운 상상은 늘 위험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을 기꺼이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씩 나아왔다.
그런 '초회사'는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스스로를 갱신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그 과정에 동참하겠다는 선택,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상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