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를 떼고 본질을 마주할 때

2026 All-Day-Project (013/365)

by Jamin

직무명세의 이름(타이틀) 을 넘어 를 다시 쓰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으레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명함에 적힌 직함을 대답하곤 합니다. "저는 마케터입니다", "개발자입니다", 혹은 "기획자입니다"라고 말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대답은 꽤 불완전합니다. 100년 전만 해도 세상에는 ‘마케터’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무가 생길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직업의 이름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생겨나고 또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회사에서 정해준 JD(Job Description, 직무 기술서)라는 좁은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곤 합니다. "저는 기획자라서 영업은 잘 몰라요", "저는 개발자라서 비즈니스 숫자는 안 봅니다"라며 스스로 한계를 긋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제는 관점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커리어는 명함에 박힌 타이틀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하고 있는 문제 그 자체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소평의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떠올려 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는 이 실용적인 태도는 오늘날의 비즈니스 현장에서 더욱 절실합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장미를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그 향기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사업 기획이라 부르든, 서비스 기획이라 부르든, 혹은 BD(Business Development)나 PM(Product Management)이라 부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행위가 결국 ‘비즈니스의 성공’과 ‘고객의 문제 해결’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향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조직은 편의를 위해 역할을 나눕니다. 사업 기획이 지도를 그려 항로를 잡고, 서비스 기획이 나침반으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BD가 새로운 기회의 섬을 찾아 나서고, PM이 배 위에서 실질적인 항해를 책임지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최근 실리콘밸리와 테크 업계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두고 그들을 관리만 하는 ‘순수 관리자’형 리더가 각광받았습니다. 하지만 AI와 기술 도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 시대는 완전히 다른 인재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전체적인 사업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디테일한 기술적 실행까지 챙길 수 있는 ‘슈퍼 제너럴리스트’, 혹은 ‘아키텍트(Architect)’형 인재가 주목받는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네 명이 필요했던 일을 이제는 AI를 활용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술을 이해하는 기획자, 비즈니스 감각을 갖춘 개발자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이야말로 AI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명확합니다. 내 역할이 무엇인지 규정짓기보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기획자라도 직접 고객을 만나 세일즈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개발자라도 시장의 현금 흐름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을 더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구조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설계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회사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직결됩니다. 많은 직장인이 "다음 승진은 팀장이 되는 것", "다음엔 C 임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회사가 만들어놓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일 뿐, 나 자신의 목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장의 ‘Next Job’이 아니라, 그 너머의 ‘Next Next Job’을 바라봐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세상에 어떤 가치를 남기고 싶은지,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싶은지를 상상해야 합니다.


회사가 나에게 부여한 JD가 설령 단순한 ‘기능 명세서 작성’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스스로는 이를 ‘비즈니스 모델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설계’라고 정의해 보세요. 주어진 업무가 ‘고객 미팅’이라 할지라도, 이를 ‘새로운 시장 기회를 포착하는 항해’라고 정의해 보세요. 여러분이 스스로의 업(業)을 정의하는 순간, 여러분은 누군가가 써준 대본대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무대를 만드는 연출가가 됩니다.


직무의 경계가 흐려지고 AI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는 이 시대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짜 일’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형식적인 역할 구분이나 타인이 붙여준 이름표에 연연하지 마세요. 대신 본질에 집중하세요. 내가 지금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격변하는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단단한 커리어이자 삶의 태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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