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조차 저렴해진 시대

2026 All-Day-Project (049/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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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전과 지금은 공기가 다르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밤을 새워 짜던 코드를 AI는 단 몇 초 만에 뱉어낸다. "아이디어는 흔하고 실행이 전부다"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Dave Kiss는 한술 더 뜬다. 아이디어보다 실행이 더 저렴해진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과거에는 '만드는 것' 자체가 거대한 진입장벽이었다. 코딩을 배우고, 인프라를 구축하고, 디자인 시스템을 잡는 과정에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컴퓨터로 하는 거의 모든 작업은 대체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해야 한다. 코딩은 애초에 잘 짜인 논리의 판이었기에 AI가 가장 먼저 정복했다. 이제 기획서 초안을 잡거나 복잡한 데이터를 요약하는 일조차 아주 저렴한 노동이 되었다. 전문성이라는 성벽이 순식간에 평지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품을 책임진다는 PM에게 남은 해자는 무엇일까?


'어떻게(How)'의 몰락과 '안목'의 부상


지난 10년간 우리는 '기능 공장(Feature Factory)'의 유능한 관리자였다. 백로그를 잘게 쪼개고, Jira 티켓을 발행하고, 스프린트 속도를 맞추는 '어떻게(How) 구현할 것인가'가 우리의 핵심 전문성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구현의 난도는 0에 수렴한다. AI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무한히 뽑아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차별화는 '무엇이 좋은 결과물인가'를 알아보는 안목(Taste)에서 온다. AI가 순식간에 100개의 기획안과 디자인 시안을 내놓을 때, 우리 팀의 맥락과 사용자 페인 포인트에 정확히 닿아 있는 '단 하나'를 골라내는 판단력이 실력이다. 왜(Why)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나침반이 없다면, PM은 그저 AI가 뱉어낸 고퀄리티 소음의 관리자로 전락할 뿐이다. 질문의 질이 결과의 질을 결정하는 시대, 우리는 '만드는 자'에서 '결정하는 자'로 강제로 이동당하고 있다.


마지막 1마일을 지켜내는 힘, 그릿


실행의 비용이 낮아졌다는 말은 서늘한 이면을 갖는다.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누구나 쉽게 포기한다는 뜻이다. 시스템 트레이딩처럼 차갑고 효율적인 세계가 도래할수록, 인간의 '태도'는 오히려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된다.


기술은 널려 있다. 하지만 제품이 화면 밖으로 나와 세상에 안착하는 과정은 여전히 진흙탕 싸움이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법적 리스크를 감내하며, 회의적인 유저의 마음을 움직여 제품을 쓰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자동화되지 않는다. 이 고통스러운 '마지막 1마일'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 즉 그릿(Grit)이 새로운 해자가 된다. 데이터가 "가망 없음"을 가리킬 때조차 가설을 비틀어 다시 도전하는 끈기, 그리고 배신당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팀을 먼저 믿어주는 '선한 바보'의 용기야말로 AI가 학습할 수 없는 인격의 영역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은 레거시의 아집인가?


토론 중에 한 가지 서늘한 의문이 나왔다. 인간의 매력이나 진정성조차 정교하게 설계된 가상의 캐릭터에 투사될 수 있다면, 우리가 믿어온 진정성은 그저 구세대(Legacy) 인간들이 효용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붙잡고 있는 아집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만약 독자가 AI가 쓴 소설에서 인간 작가보다 더 큰 위로를 받는다면, 그때도 인간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성은 '제작의 과정'이 아니라 '책임의 주체'에 있다.


AI는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시스템이 차가워지고 결과물이 범람할수록, "이 결정은 내가 내렸고, 결과가 어떻든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인격적 주체의 존재는 강력한 프리미엄 신호가 된다. 우리가 수제 시계나 작가주의 영화를 찾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그 제품 너머에 있는 '인간의 의도'와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성이란 '나를 갈아 넣었다'는 고백이 아니라, '내가 이 결과물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가치 창조의 지휘자가 된다는 것


이제 PM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컴퓨터 작업) 일은 과감히 AI에게 위임해야 한다. 지휘자의 역할은 개별 음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향곡의 '맥락(Context)'을 설계하고 연주자들이 하나의 비전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다.


전문성이라는 해자가 해체된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PM이라는 한 사람의 그릇이다. "나는 어떤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루한 관리 업무와 반복적인 실행에서 벗어나, 제품의 본질인 가치와 철학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PM에게 주어진 가장 뜨겁고도 위험한 기회다.


우리는 단순히 제품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AI라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채, 불확실성이라는 바다를 건너 '가치'라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항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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