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060/365)
문제정의/풀기 에 이어서
문제의 가치에 이어서
지난 글 <Step 1: 우리는 이 문제를 얼마나 '비싸게' 풀 수 있는가>에서 우리는 Cost < Price < WTP 라는 생존 부등식을 통해 제품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증했다.
개별 사용자의 고통을 가치로 환산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그 고통의 총량이 모여 있는 영토의 크기를 측정할 차례다. 회의록 요약 서비스 '메모메이트(MemoMate)'가 김 대리 한 명의 고통을 3만 원의 가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면, 이제 기획자는 더 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고통을 겪는 '김 대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중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시장 규모(Market Sizing)의 본질이다. 기획자에게 TAM, SAM, SOM은 단순한 투자용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복할 영토의 경계를 정하고, 그 안에서 어떤 순서로 승리할지 결정하는 '전략적 기동 계획'이다.
TAM은 우리 제품이 미래에 모든 제약을 극복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영토다. 많은 이들이 TAM을 '기존 시장의 파이'로 정의하는 실수를 범한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 기획자는 카테고리 크리에이션(Category Creation)의 관점에서 TAM을 바라본다. 사용자가 인지하지 못한 잠재적 고통(Latent Pain)을 수치화하여 새로운 카테고리를 선언하는 것이 TAM 정의의 시작이다.
메모메이트의 TAM은 단순히 '속기사 시장'이나 '녹음기 판매 시장'이 아니다. 우리의 TAM은 "기록되지 않아 휘발되던 모든 비즈니스 지식의 가치"다.
전 세계에서 매일 열리는 수억 개의 회의 중 문서화되는 것은 1%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9%의 휘발되는 정보를 자산화할 수 있다면? 기획자가 정의하는 TAM이 '기록 툴'에서 '기업 지능의 OS'로 확장되는 순간, 제품의 북극성 지표(North Star Metric)와 도달 가능한 시장의 크기는 차원이 달라진다.
야망은 거대하되, 칼 끝은 예리해야 한다. SAM은 우리의 현재 비즈니스 모델, 기술력, 규제 대응 능력이 '유효하게' 미치는 범위다.
메모메이트가 현재 '한국어 모델'에 특화되어 있고, '보안'이 생명인 금융권 B2B에 집중하기로 했다면, SAM은 '국내 금융권 및 대형 로펌의 사무직 회의 시장'이 된다.
여기서 기획자는 제약 이론(Theory of Constraints)을 통해 정복해야 할 영토의 성벽을 확인해야 한다. 기술적 장벽(보안 인증)이나 언어의 장벽은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SAM의 경계를 획정하는 동시에, 다음 스프린트에서 부수어야 할 가장 약한 고리가 된다. 이러한 병목을 식별하고 SAM을 정의하는 과정은 곧 우리가 해결해야 할 다음 단계의 과업(Backlog)을 리스트업하는 과정이다.
기획자가 저지르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처음부터 SAM 전체를 향해 화력을 분산하는 것이다. SOM은 오늘 당장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원으로 점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객군이다.
"국내 모든 금융사"는 너무 넓다. "서울에 본사를 둔, 매주 10시간 이상 회의를 진행하는 외국계 투자사의 심사역들"로 좁혀보자. 이들은 회의록의 정확도에 극도로 예민하며(High WTP), 기록의 휘발로 인한 고통이 가장 크다.
SOM을 좁게 잡는 이유는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실패의 해상도(Resolution of Failure)를 높이기 위해서다. SOM이 구체적일수록 기획자는 고객의 피드백을 원자 수준(Atomic-level Understanding)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이 고해상도의 학습 데이터가 상위 시장인 SAM과 TAM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된다.
시장이 넓으면 "왜 안 팔리는지" 알 수 없지만, SOM이 좁고 구체적이면 "A사 김 팀장이 결제 단계에서 망설인 이유"를 원자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고해상도 실패 데이터가 SAM과 TAM으로 나아가는 가장 강력한 연료가 된다.
기획자는 지도를 그린 뒤, 화살표를 그려야 한다. SOM에서 승리한 뒤 어떻게 SAM으로 넘어갈 것인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전략적 불균형(Strategic Imbalance)이다. 초기 SOM 고객들에게는 우리가 받는 가격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가치를 제공한다. 필요하다면 수작업을 동원해서라도 고객의 '와우 포인트'를 만든다.
데이터 확보: SOM에서의 압도적 만족을 통해 금융권 특유의 은어와 문맥 데이터를 확보한다.
신뢰 자본 구축: "금융권 심사역들이 쓰는 바로 그 툴"이라는 평판을 만든다.
확장: 이 신뢰와 데이터를 무기로 일반 대기업(SAM)으로 전선(戰線)을 확대한다.
다시 우리의 백로그를 보자. 오늘 논의 중인 그 기능은 어느 동심원을 향하고 있는가?
오늘 당장의 SOM 유저를 감동시켜 '고해상도 피드백'을 얻기 위한 기능인가?
아니면 SAM으로 확장하기 위한 '보안 인프라' 구축인가?
혹은 TAM이라는 거대한 야망을 향한 '카테고리 정의'의 메시지인가?
기획자는 단순히 화면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좁은 SOM이라는 땅에서, 저 멀리 보이는 TAM이라는 신대륙까지 가는 영토 확장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지도 제작자다.
지도는 영토 그 자체가 아니지만, 기획자가 어떤 지도를 그리느냐에 따라 팀이 도달할 수 있는 영토의 한계가 결정된다. 우리는 기능을 쌓는 벽돌공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지평을 넓히는 탐험가여야 한다.
오늘 당신이 그린 지도의 끝에는 어떤 세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