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091/365)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51: 지금의 나는 과거의 총합인가?
이영도의 《퓨처워커》에서 운차이 발탄이 형 신차이에게 건네는 말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형이상학을 압축한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있다. 과거에 이렇게 연습하고, 행해온 것이 있으니 지금 이렇게 할 수 있고 미래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얼핏 성실한 수련의 가치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소름 끼치는 결정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과거가 고정된 실체라면, 현재는 그 과거가 밀어 올린 필연적 결과물에 불과하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미래 또한 과거라는 설계도에 의해 이미 완공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현재의 능동성은 소멸한다. 현재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고정된 과거’로 편입시키는 공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퓨처워커》의 세계에서 ‘시축(時軸)’이 뒤틀리고 시간이 정지하는 현상은, 이 인과의 사슬이 극단에 달해 생명력을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소설은 인물들이 각자 품고 있는 과거의 상처를 ‘가시’라는 탁월한 비유로 설명한다. 딤라이트가 케이트에게 말하듯, 슬픈 추억은 “움직이지 않으면 아프지 않지만, 건드리면 아픈” 가시와 같다. 그러나 이 가시는 단순한 통증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인물의 보행(미래로의 전진)을 방해하는 족쇄가 된다.
신차이 발탄은 이 ‘화석화된 과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자이펀의 선장이자 검사인 그는 가문의 비극이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복수라는 정해진 궤도만을 반복해서 회전한다. 그에게 과거는 “연습하고 행해온 것”의 축적이 아니라, “상실하고 묶여버린 것”의 감옥이다.
비평가들의 분석처럼, 《퓨처워커》에서 시축이 멈춘 이유는 인물들이 집단적으로 트라우마 속에 침잠했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와 ‘다른’ 사건이 발생할 때 비로소 도래한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과거의 상처를 반복 재생(Repetition)하기만 한다면, 시간은 흐를 동력을 잃는다. 그들은 미래를 걷는 ‘퓨처워커’이기를 포기하고, 과거라는 폐쇄된 원형 경기장을 빙글빙글 도는 수감자가 된 것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정체성을 두 층위로 구분한다. 하나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성질인 ‘동일성(Idem)’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와의 약속이나 실존적 결단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자기성(Ipse)’이다. 건강한 정체성은 이 둘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퓨처워커》의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이 긴장은 붕괴한다. 변화가 멈춘 세계에서 ‘자기성’이 개입할 여지는 사라진다. 꽃은 피지 않고 이미 죽은 자가 부활하는 현상은, 생명론적인 ‘생성’이 멈추고 오직 고정된 ‘상태’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운차이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정체성은 오직 ‘과거의 누적’으로만 정의된다. 여기서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인과율의 결과값이다. 과거의 의미를 재해석하거나(Narrative Identity), 과거의 선택을 넘어서는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다면 정체성은 결정론의 감옥에 갇힌 시체와 다를 바 없다. 소설 속 세계의 정지는 곧 ‘자유 의지의 질식’을 시각화한 것이다.
《퓨처워커》는 이 절망적인 결정론에 어떻게 균열을 내는가? 소설은 과거를 지우는 마법이 아니라, 과거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라는 태도의 변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퓨처워커’인 미는 미래를 보는 공포를 겪지만, 결국 그 미래조차 현재의 선택이 빚어낼 그림자임을 깨닫는다. 파는 언니의 연인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순된 감정을 부정하는 대신,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회복한다. 특히 감정 결핍자처럼 보였던 쳉이 미를 ‘기다리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기다림은 결정론적 세계에서 가장 능동적인 행위다. 그것은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할슈타일 후작이 마침내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나, 인물들이 자신의 상처(가시)를 뽑아내는 대신 그 가시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장면은 결정론을 극복하는 실존적 도약을 보여준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 과거에 부여하는 ‘현재의 이름’은 바꿀 수 있다. 운차이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의 조건인 것은 맞지만, 그 조건 위에서 어떤 건물을 지을지는 현재라는 설계자의 몫이다.
《퓨처워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과거의 산물인가, 아니면 미래의 창조자인가?"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해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과거라는 단단한 대지(Ground) 없이는 미래라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한다.
운차이가 신차이에게 한 말은 반절의 진실이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이다. 그러나 그 과거가 미래까지 완전히 규정한다는 명제는 소설의 결말을 통해 부정된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물들이 과거의 유령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이라는 미래의 속성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정체성이란 고정된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축 위에서 수행되는 ‘지속적인 창조’다. 《퓨처워커》는 과거의 중력에 눌려 멈춰버린 우리에게, 발바닥의 가시를 응시하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라고 속삭인다. 그 한 걸음이 비록 과거의 연장선일지라도, 그 방향을 트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