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일하기의 쓸모
게스트하우스가 바꾼 하루_일과
하루 15분만 일하는 날이 종종 있다. 요즘은 부쩍 그런 날들이 늘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오전 내내 글을 쓰거나 다른 할 일을 챙긴다. 가끔 이른 낮잠도 잔다. 점심까지 챙겨 먹은 뒤에야 본격적인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잠깐 가게에 간다. 도서관까지 들렀다 와도 3-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는 4시간만 일한다'는 책 식의 '거대 담론'을 말하는 건 아니다. 가장 작은 일 중의 하나, '마이크로 워크'가 주업무이기 때문이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이다.
코로나가 슬슬 끝나면서 해피 엔딩을 기대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보복여행 때문이었는지 실제 여행객도 늘었다. 모처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밤낮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일하는 날도 생겼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불경기의 한복판이다. 흉흉한 전쟁 소식에 고물가, 고금리가 압박한다. 높아진 대출 이자에 쌓이는 원금 상환 고지서가 '돈 잔치'가 끝났음을 알린다. 코로나 기간 내내 휴업하던 도서관 앞 카페도 얼마 전 다시 문을 열었다. 향긋한 커피 향과 함께 거리에 다시 울리던 노랫가락이 내심 반가웠다. 그런데 어제 보니 가게를 싹 비우고 철수했다. 이런 식으로 폐업한 업체가 그 카페나 고깃집만이 아니었다. 임시 휴업한 분식집까지,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만 무려 4개나 봤다. 희망고문 속에 그나마 버티던 업체들이 속속 죽어나가고 있다.
게스트하우스 요금이 한때 11,000원(8인도미토리 평일 1인 기준)까지 떨어졌다. 지역은 물론, 거의 전국 최저가 수준이다. 게스트하우스 적정 요금은 2만원대 이하로 본다. 스스로도 그 이상 요금은 숙박을 주저하게 된다. 더 좋은 편의와 개인 침실이 제공되는 일부 모텔 가격도 그 정도까지 떨어져서다. 물론 가족이나 순수(?) 여행객, 공용공간이 필요한 단체 등에게 게스트하우스는 대체 불가다. 화려한 파티나 최신 설비로 모텔을 능가하는 요금의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하지만 대개 게스트하우스는 부담 없는 가성비가 특징이다. 최근 도미토리 요금을 13,000원까지 올렸지만, 여전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 숙박객이 몰리지 않는 이상, 객실당 몇 명, 1명이 이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최근 오른 난방비와 수도 등 각종 요금에 조식 같은 재료구입비까지 더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처음 15분 일하기는 여기서 시작됐다. 1명이라도 숙박객이 있다면 가게는 가야 하기 때문이다. "왕복 차비라도 아껴보면 어떨까?" 3000원 중 1500원이라도 줄이면, 식빵 반 덩이, 우유 한 통을 더 살 수 있었다.
15분 일하기의 실체는 이렇다. 버스를 2번 갈아타고 가게에 갔다가, (직행노선이 없다) 지하철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혹시 이것이 불법은 아니겠지? 그럼 환승 시간 빼고 일할 시간이 딱 15분 남는다. 행여 일이 좀 늦어지면 지하철까지 5분 거리를 2분 남기고 뛰어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전력질주할 때도 있다. 5,4,3,2,1. (셀프 카운트) '삑', "환승입니다." 멘트가 나오면 환호한다. "휴, 오늘도 성공이다." "그런데 왜 1500원에 이렇게 목숨 거는 거임?" 때론 스스로도 웃프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40을 훌쩍 넘으면서 이전까지 별도 뛰어본 기억이 없다. 그것도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마냥 뛰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뭘 해도 느긋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업무 지시에도 느긋, 집안 심부름에도 느긋, 천하태평이었다. 나이 들며 요령이 생긴 걸까? 배짱이 세졌는가? 세상사가 만만해졌는가? 이전 직장 상사가 저녁에 일 주면서, "나는 다음날 아침 출근 전 책상 위에 보고서를 올려두는 사람을 가장 좋아해요"라고 압박할 때도 요지부동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볼 다른 목적지라도 생기면 007 작전을 방불한다. 시간을 맞추고 촌각을 다툰다. 한 날은 이후 공항 가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05분까지 도착해 상황파악, 15분에 일 마치고 출발, 25분내 환승버스 탑승완료" 계획을 되새겼다. 가게에 도착하기 전, 무엇부터 어떤 순서대로 할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창 했다. 15분이 생각보다 짧아, 자칫 하면 계획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중요한 일부터 역순으로 해야 한다. 여차하면 뛰쳐나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어서다. 숙소에 도착해 우선 신발장 열쇠가 제자리에 꽂혀있는지 쭉 훑어봤다. 혹시 누가 잊어버리고 가져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음은 출입키 반납 확인, 퇴실자 객실에 난방기가 꺼졌는지 등을 살핀 뒤 쓴 침구류를 정리했다. 다음에 샤워실 청소, 화장실 휴지 등을 비우고 나니 벌써 나갈 시간이 됐다. 아뿔싸 10분 남았다. 마지막으로 식탁을 닦고, 다음 숙박자를 위한 조식과 출입키 배치 상태 등을 확인하고 후다닥 가게를 빠져나왔다. 인터넷 버스 도착시간을 보니 차편은 이미 떠났다. 다음 차 도착은 14분 뒤였다. "이렇게 작전이 실패하는 날도 있구나." 좌절 직전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행히 다른 좌석버스 경로가 떴다. 이것도 도착 2분 전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뛰어야 했다. 예상 소요시간 5분,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가던 방향으로 또 다른 좌석버스가 눈에 띄었다. 이것은 뛰던 방향이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 횡단보도는 이날따라 왜 그렇게 먼지, 저쪽에 벌써 주황색 좌석버스 지붕이 보였다. "이것조차 놓치면 끝이다." 때마침 녹색 신호등 불이 들어왔다. 건넘과 동시에 환승장 중간쯤에 버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긴 사람 줄을 헤치고 탑승해 교통카드를 찍었다. "환승입니다." "오늘도 작전 성공. 미션 파서블이다."
이렇게 뛰어다니면서 스스로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게임은 자신이 만든 세계다. 게임의 룰도, 미션도, 보상도 모두 자기가 설계했다. 실행자도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 게임에 더 애착이 가는지 모른다. 1500원에 이쪽저쪽 뛰어다니는 캐릭터가 결코 밉지 않다.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시간의 유한함이다. 어떨 때 15분은 멍 때리고 차 한 잔 마시면 훌쩍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때는 글 한 편, 하루 일과를 완성하는 시간이 된다. 15분에 몰입해 살아보면 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한없이 안 갈듯 하다가도 '작전'만 개시하면 시간은 그아말로 날아간다. 존재의 유한함, 자신의 젊음도, 일 할 수 있는 날들도 이렇듯 어느 순간에 끝날지 모른다. 촌각을 다투는 긴장감 속에서, 시간여행자가 잃어버린 청춘의 열정을 다시 되살려 준 것, 그것이 바로 15분 일하기의 쓸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