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루 한 장의 포스터 디자인, 업이 되다

아직도 디자인을 모르겠지만, 끈질기게 이뤄가는 두 번째 노력.

by 수우수



제주에 내려와서 좋은 기회로 비용을 지원받아 개인 심리 상담을 꽤 오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왜 다시 제주로 내려와야 했는지, 왜 서울에서 버틸 수 없었는지, 20대의 절반을 투자해 공부한 전공 분야에서 왜 더는 일을 이어갈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디자인이라는 전공과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기술이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의 재능은 다른 곳에 있는데,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그 일만 하려다 보니 진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감했습니다. 미술대학, 그중에서도 시각디자인학과 재학 시절, 저는 졸업할 때까지도 디자인이 무엇인지 도저히 감을 못 잡고 방황했습니다. 손그림이 좋아서 미대생이 되었는데, 눈앞에는 디자인이라는 아주 엄중하고 커다란 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매주, 매일 과제를 완성하고 발표해 평가받아야 했고, 교수님의 피드백, 동기들의 시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곧 공포가 되었습니다. 졸업은 했지만, 전공 자체가 트라우마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었다면 왜 중간에 과를 바꾸거나 복수전공이라도 시도하지 않았냐 묻는다면, '저도 모르겠어요.' 계속하면 될 줄 알았어요.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어요. 원래 꿈인 손그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 잊어버릴 정도로, 디자인과에 적응하는 일이 나의 20대의 절반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너무 열심히만 해서 탈인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만이 아니라 '잘' 해야 하는 건데요.


졸업 후에도 생계를 위해서 디자인 업계를 전전했지만, 작정하고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이 업에 진지하게 종사하겠다는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어정쩡하게 발을 담그고 더 들어가지도, 뛰쳐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어중간하고 어색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디자인을 하는 것만으로, 이것으로 돈을 버는 것 자체로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하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제가 졸업한 대학은 꽤나 이름난 미술대학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디자이너로 계속 불러주는 곳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은 직장을 몇 번을 바꿔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또 '열심히만' 했던 것입니다. 직장에 적응하려 노력하면, 버티다 보면 무언가 나아지지 않을까. 최소한의 돈을 벌고, 직장인이라는 명함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제가 더 오랜 시간 '진짜 꿈'을 잊고 젊음을 흘려보내도록 했습니다.



오랜만에 열어본 대학 시절 작업 사진들. 부끄러우면서도 참 귀엽고 뽀짝하네요.



어느새 저는 디자이너 공고만 읽어도 심장이 뛰고 무서워 눈물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직장에서는 때때로 숨을 잘 쉬지 못해서 숨을 쉬는 방법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상담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부모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엄마를 잃을 수 없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더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제주에 내려와서는 디자인을 시원하게 내려놓았습니다. 아예 훌훌 털어 보냈습니다. 디자인 생각도 하지 않고, 디자이너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도 포기했습니다. 당분간은 무직자로 살더라도, 일단 살아보자.


우선 손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손그림이라는 친구는 사뿐사뿐히 제게 다가와 '다시 만나서 기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은 해야 하는 일, 끝내야 하는 업무, 당장의 과제에 허우적대느라 손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해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제 발로 먼저 자신의 꿈을 떠나 외부의 요구, 남이 정한 의무, 보이는 것에 신경 쓰고 있었으니 소중하고 고결한 꿈의 행위를 이전처럼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터입니다.


하지만 제주에서 오래 걷고 (바다를 따라 난 올레길을 하루에 3~4시간씩 걸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제주에 내려온 봄에 한 달에 15권씩 꼭 읽었습니다.) 틈이 나면 고전 영화도 많이 보면서 머리에 숨이 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에도 바람이 솔솔 통했고요. 덕분에 어느 날 손그림이 불쑥 제 왼손을 찾아왔습니다. 매일 찾은 도서관, 서가들 사이 작은 의자 위에서였습니다. 그 손그림이 너무너무 소중해서 주변 이곳저곳에 자랑하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가 손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필요 없을 만큼, 든든하고 대견하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c) 수우수



(c) 수우수



그 이후로는 그림이 쑥쑥 그려졌습니다. 적지만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일이 즐거웠고, 제주 소재 기관의 SNS에 손그림을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기관/업체와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저에게 디자인이 아닌 "손그림을 그려달라"라고 콕 집어 이야기해 주는 분들에게 고마웠습니다. 디자인을 하지 않고도 바쁘게 지내며 활동적으로 지낼 수 있는 삶, 치유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천히, 다시 디자인도 해보고 싶은 마음, 제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해낼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선으로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제주에서 일 년을 보낸 후인 2025년 이른 봄, 제주 취업 지원 기관을 찾아가 구직 정보를 등록했습니다. 다만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직업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직업상담사 선생님과 깊게 나눴습니다.


이어서 디자인 자격증과 컴퓨터 자격증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디자인과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디자인 자격증은 너무 기초적이라 취득할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 자만이 아니었을까, 기본기부터 다시 다진다면 사무실 안에서 더 자신감을 얻고 적응력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두 달간 기본 자격증들을 공부하고 GTQ 자격증 세 종류를 모두 취득하면서, 정말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마음가짐이 절로 들었고 그 기분이 되려 산뜻하고 좋았습니다. 이 마음이 동력이 되어 하루에 하나씩 디자인 연습을 해보는 챌린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c) 수우수



일상의 생각들, 오늘 먹은 가장 맛있었던 음식, 길을 걷다 눈에 들어온 자연물 등이 디자인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SNS에서 '이런 디자인은 어떻게 하는 거지?'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저장해 두고, 외국 디자이너들이 올려주는 유튜브 영상 등을 보면서 따라하고 있습니다. 2025년 3월 4일부터 시작해, 4월 2일인 오늘은 1일 1 디자인 30일 차입니다. 어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디자인을 완성했습니다.


30일 차인 오늘까지의 느낀 점은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SNS의 알고리즘이 디자인 관련 콘텐츠로 바뀌었고, 시도해보고 싶은 그래픽 디자인을 수집하고 있다는 점. 중간에는 한 번 이런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아~ 이런 게 디자인이구나. 디자인 문법이라는 것, 아름답네."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무려 5년 간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수년간 시간이 더 흘렀는데 이제야 깨닫는 저도 참 신기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목표는 300일까지 완수해 보기. 일단 무언가를 그 정도로 끈질기게 해 본다면, '뭐라도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그러기 위해서 우선 30일인 오늘까지, 첫 산을 잘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 저는 지금 '열심히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즐기며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잘 돌아가지도 않는 컴퓨터를 꽉 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들게 디자인을 하던 저는, 저에게도 재미있게 디자인하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과연 올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지는 몰랐습니다. 그때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얘야, 이런 날도 온다!'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지금의 나.



(c) 수우수



매일 디자인을 하면서 조금씩 실력도, 밀도도, 속도도 나아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매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가볍게 임해보고자 포스터 디자인은 저녁 시간대에 하기로 정했습니다. 오전에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디자인 외주 일을 하며,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오늘 하루 만들어보고 싶은 포스터를 생각하게 되고, 길가나 주변의 작은 자연물에도 시선이 오래 머물고 사진을 찍어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매일 디자인 챌린지를 SNS에 기록하는 저를 보고, 지인이 디자인 과외 일을 연결해주기도 했습니다. 또, 제 SNS를 팔로우하는 분을 통해 또 도내 기관의 행사 포스터 등의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시각디자인업으로 사업자등록도 마쳤지요.)


누군가는 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가 뭐라도 하면,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일단 시작하고, 몸을 움직이면 뭐라도 되는 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c) 수우수



제주에 내려와 생활한 지 1년 반, 햇수로 벌써 세 번째 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뭐가 될지 모르겠어도 일단 몸을 움직이기, 몸으로 부딪치기-그러면 뭐라도 결과가 나온다는 깨달음과 믿음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매일 하루에 한 장, 포스터 디자인을 하는 챌린지를 혼자 진행 중입니다. 평생 '진지한' 업으로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의 재능은 디자인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세상에 재밌는 일은 더 더 더 많으니까요. 그러나 일단 해보려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끈질기게. 앞으로도 이렇게 끈질기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삶을 이 공간에 기록해보려 합니다.




디자인 30일째! (c)수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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