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덕질로 물질의 무용함을 깨닫다
너의 덕질일기16
사실 우리 집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안과 밖이 완전히 일치하는 투명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좋게 말하면 일체의 표리부동을 거부하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단무지'인 것이다.
누구를 닮아 이러냐고?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완벽하게 필자를 쏙 빼다 닮았으니 말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유전자의 승리(?) 혹은 패배(!)의 현장이 바로 우리 집이다.
그래서일까? 나와 나의 그녀의 꼭 닮은 점 중 하나는 천부적인 귀차니즘과 선택적 집중이었다. 다만 그녀의 덕질은 소싯적에 내가 가져보지 못한 독보적인 영역이니, 옛 어른들이 말씀하신 청출어람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녀에게 덕질이 있다면, 나에겐 만화가 있었다. 초등학교가 아직은 국민학교였던 시절, 이제 막 이름표 달고 입학한 1학년이었던 나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화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상무 작가의 <비둘기 합창> 포스트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만화가게는 나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나의 경제관념도 싹이 텄다. 저 엄청나게 재미있고 새로운 세상을 읽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함을 캐치했고, 나의 모든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아르바이트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만화이기도 했다. 세상살이에 가장 절실한 '돈'의 필요를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고나 할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 집 그녀는 다소간 늦되었다. 엄마가 초1 때 깨우친 경제관념을 중1 때 겨우 깨우쳤으니 말이다.
그녀의 경제관념을 본격적으로 성장시킨 것은 덕질!!! 그러나 거기엔 엄청난 함정이 숨어 있었으니, 덕후 월드에는 그들만의 계산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은 처음 그녀가 컵홀더 순례를 시작하던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덕후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경제생활은 심플했다. 명절이면 지갑에 채워지는 용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문방구에서 주전부리나 하고 엄마에게 고리대금(?)이나 놓는, 단조롭다 못해 평범한 생활이랄까?
심지어 그녀의 곳간(지갑)은 화수분이었다. 근처에 사시는 외할아버지가 만날 때마다 천 원씩은 쥐어주시니 그녀의 지갑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우물 같았다.
그러나 덕질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수많은 굿즈를 모셔오기 위해서 그녀의 지갑은 날로 말라갔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덕질의 세계에 빠져들수록 우리 가족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덕질에 필요한 것은 금전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콘서트나 팬사(인회)로 눈을 돌리는 순간, 이미 돈은 무용하다. 콘서트나 팬사는 돈만 있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금손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맛볼 수 없는 것이 콘서트와 팬사였다. 세상 모든 부모들에겐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가련한 덕후들에겐 그만한 비극이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바야흐로 청출어람. 엄마인 필자가 그저 만화책 한 권이라고 더 볼 요량으로 주전부리도 포기하고 소소한 알바에 집중할 때, 그녀는 덕질을 통해 돈의 중요성과 그 무용함을 동시에 배워나갔다.
이 드넓은 덕후의 강호에는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용돈이 넉넉해도 타고난 성실성(!)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꾸준한 노력으로 클릭에 공을 들여야만, '그분'을 영접할 수 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덕질 3년이면 물질의 무용함을 깨우친다. 가히 철학적인 경지이다. 덕질은 소녀를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