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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Feb 12. 2023

추천 편지, 아버지에게

이제 걸으세요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드디어 이사를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혼자 계셨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셨는지 함께 산다고 하십니다. 늘 그렇듯 할머니는 소리 높여 찬송가를 트시는데 할아버지가 잘 버티실지 걱정입니다. 이사 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깔끔하게 준비된 할머니 옆방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날은 예보에 없던 가을비가 내려 손은 차고 물에 젖은 발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사 날에는 항상 비가 오는지. 


아버지 오늘은 가을이 끝나는 날 상강(霜降)입니다. 저는 어제처럼 얇은 가디건을 입고 밖을 나왔는데, 새벽 공기에 몸이 떨리며 문득 아버지의 이사 날이 떠올랐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던 이슬비, 잔디 위에 고인 투명한 물방울, 그리고 사람들이 담배처럼 뿜어대던 하얀 입김. 저는 그때 입김이 금세 허공에서 사라지듯 이 시간도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당신과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더 이상의 기다림은 필요 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지금 돌이켜보니 그동안 나눴던 대화가 모두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잠시 당신을 떠올리면, 성당 잔디밭에서 미사 중 크게 방귀를 뀌고 붉어지던 얼굴, 우리 집을 지으며 삽으로 모래를 푸던 모습, 제가 입주할 아파트를 화상통화로 바라보며 좋다 좋다 말하던 표정이 생각나지만 모두 단편적인 것들 뿐입니다. 혹시나 당신이 자주 보던 책에 숨겨진 편지라도 있을까 뒤적여봤지만, 거기엔 세계 각국의 수도와 전국의 명승지와 유명한 산 이름만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온종일 침대에 누워 걷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나요?


저는 40년을 함께 했지만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젊은 시절의 품었던 꿈도, 사라지기 전에 느꼈을 후회와 두려움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건 단지 당신의 걷고 싶다는 열망뿐. 아버지 그래서 저는 *추천(追薦)의 글로 이 말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아빠, 그곳에선 끝없이 걸으세요."


*추천(追薦) :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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