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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Oct 31. 2022

어린이날까지는 살아야지!

똥쟁이 국민학생의 하루

"어린이날까지만 살고 죽어야지."

나는 엄마가 사준 골덴바지에 누런 똥을 묻힌 채, 5층 옥상에서 바닥을 내려 보며 생각했다.


나는 서동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2학년 9반 3번인데 이름은 말할 수 없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 비밀로 해야겠다. 한 달 전인가, 상철이와 비석 치기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고려 속셈학원에 데려갔다. 무슨 속셈을 배우는 걸까? 사람을 속이는 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전문 학원까지 다니면 악당이 돼버리는 거 아닐까? 무섭지만 왠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원장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강아지, 고양이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며, 몇 개인지 맞혀보라고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수를 세며 자신 있게 답했다. 벌써 2학년인 내게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선생님과 엄마 표정이 변했고 그날부터 내 인생도 변했다.


나는 학원에 있는 바보 친구보다 더 바보라서 토요일 오후가 돼도 집에 갈 수 없었다. (☐ + 3 = 7) 같은 문제를 풀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네모 칸에 동그라미(○), 세모(△)를 그려 넣었다가 선생님에게 한참을 맞았다. 학교에서도 많이 맞아봐서 맞는 건 참을만했는데, 큰 교실에서 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무서웠다. 상철이와 인목이가 보고 싶었다. 본래 이 시간에는 야구를 한 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를 해야 한다. 올해는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 돼서 야구장도 싸게 들어갈 수 있는데.. 이게 뭐야? 죽어버릴까? 떨어져서 죽어버릴까? 교실에서 울며 생각했다.


다행히 학교는 학원과 비교하면 천국이었다. 가끔 산수 문제를 못 풀어서 창피를 당하긴 했어도 나는 야구를 잘해서 친구들이 많았다. 대부분 남자애들이었지만, 한두 명은 여자아이도 있어서 다락방에서 검은 별 놀이를 하며 재미있게 보냈다. 그런데 오늘 나는 큰 실수를 해버렸다. 옷을 입은 채 교실에서 똥을 싸버린 것이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똥을 싸려 하면, 애들이 똥싸개라고 놀려대서 참았는데 거지 같은 산수 시간에 방귀를 뀌다 바지를 누렇게 적셔 버렸다.  


"아, 어떡하지.."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양호실에 가야겠다고 말했는데, 내 얼굴이 창백했는지 선생님도 얼른 가라고 하셨다. 가방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똥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눈치 없는 여자아이가 날 부축해서 양호실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 집으로 냅다 뛰려 했는데.. 하는 수 없이 양호실로가 체온을 재고 약을 먹은 후 침대에 누웠다. 아이가 나간 후 선생님이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지 "너 뭐 쌌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아니요.."라고 작게 대답한 후 잠든 척을 했다. 얼마 후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방에 똥을 흩날리며 집으로 전력 질주했다.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집 근처에 도착하자 똥쟁이가 되었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너무 일찍 하교해서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난 우리 집이 있는 5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똥 묻은 팬티를 화분 뒤에 숨기고, 바지를 벗어 옆에 둔 채 벌렁 누워 하늘을 봤다. 하얀 뭉게구름이 너무나 평화롭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학교에서는 똥쟁이, 학원에서는 바보가 돼서 놀지도 못하는데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떨어져 죽자" 생각하고 바지를 입은 후 바닥을 내려봤는데, 회색 아스팔트가 날카로운 쇠못처럼 보이며 덜컥 겁이 났다. 좀만 더 살아볼까? 며칠만 있으면 어린이날인데.. 그날은 프로 야구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도 있고, 어린이 특선 만화도 하고, 잘하면 과자 종합 선물 세트도 받을 수 있는데 일단 어린이날까지만 살아볼까?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집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가져다준 가방이 있었고, 아무도 내 상황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얼른 바지를 빨아 널고 잠을 잤다. 다음날 학교에선 아무 일도 없었고 얼마 후 학원을 그만두면서 나는 죽지 않게 되었다. 설레는 어린이날이 날 살린 것이다.


나는 이제 커서 더 이상 부끄러운 실수를 하진 않지만, 죽고 싶은 순간에는 항상 어린이날을 떠올린다. 과자 선물 세트 같은 작지만 달콤한 기쁨.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축제를 기다리는 설렘. 이 두 가지를 마음에 품은 채 살고 있다. 나는 안다.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언젠가 다시 몸에 똥을 묻히고 셈을 못 하는 바보가 돼서 모든 사람이 날 싫어한다고 해도 사라지진 않을 테다. 나는 그곳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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