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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Dec 03. 2022

당신 눈에 키스하고 싶어요

눈빛으로 기억되는 사람

벚꽃이 만개한 5월의 봄, 저는 덕수궁을 걷고 싶어 휴가를 냈습니다. 하지만 궁은 닫혀 있었고 돌담길에는 탄성을 지르며 꽃을 찍는 연인들만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싫어서 조용한 정동극장으로 이동한 후 커피를 사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아끼던 책을 펼쳤는데, 순간 평화로움과 쓸쓸함,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분명 사람들의 소음은 싫었지만 이렇게 홀로 있는 걸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는 책도 저를 위로할 수 없어서, 금세 일어나며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신님, 제게도 사랑을 주세요.
 
놀랍게도 신님은 제 기도에 응해주셨습니다. 우연히 나간 드로잉 모임에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안정적인 삶이 지루해서, 창의적인 활동을 '한번' 경험하러 왔다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재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저는 잘난 척하는 그가 싫어서, 그림에 대한 감상평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임 후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데 그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이님, 말씀하시는 거 인상 깊어요."
"네? 어떤 면이요?"
"너무 솔직하셔서 놀랬어요."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라 그래요. 대단치도 않은데요."
"그래도 제겐 새로웠어요. 그런데.. 제이님."
"왜, 제 그림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세요?"
"..."
 
그날 이후 그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임에서 저를 힐끔 쳐다보다가, 제가 그 사람 작품에 대해 말할 때면, 크고 맑은 눈으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엄청난 집중력. 별 것 아닌 제 피드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 아름다운 눈을 갖고 싶다, 눈에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며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끝나는 날, (다행스럽게) 그가 개인적으로 연락해도 되는지 물었고, 우린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사귀기 전의 남녀가 그러하듯, 우리도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스콘 빵을 먹어보기도 하고, 잊고 있던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가까워지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끼던 책("뉘앙스")을 건네줬는데, 그가 제 말투나 그림이 책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말해줘서, 그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저만 좋아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이성이 있는 술자리에 참석하면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참여했는지, 언제 떠날 건지 등을 틈틈이 문자로 보내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멀리 있었지만 그가 옆에 있는 듯했고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스럽기만 했지요.
 
그런데 한 가지 불길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수 차례 만나면서도 한 번도 손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좀 느린 사람인가? 하며 자위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초조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음 주에 저희 집 근처로 온다고 했을 때 저는 왠지 설레서 많은 걸 준비했습니다. 집을 청소하고 백화점에서 아로마 향 디퓨져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에어컨을 설치했습니다. 저는 더위를 타지 않아 수년간 에어컨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온다면 꼭 필요할 것 같아 서둘러 장만했습니다.
 
약속 당일 저는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그 사람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그의 짐을 들어주려 해도 거부하고, 제가 예약했던 식당에 가서는 맥주 한잔 마시지 않습니다. 음식도 먹지 않고 대화도 피하며 형식적인 대꾸만 해댑니다. 저는 어색함을 참을 수 없어 얼른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선 분위기가 좀 나아졌지만, 이 사람이 절 만나는 걸 후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아, 얼마 후 둘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요구하다 깔끔하게 차이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몇 사람을 소개로 만났지만, 그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맑지만 저를 삼켜버릴 듯 타오르던 그 눈빛 말이죠. 저는 그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 그 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했습니다.
 
몇 개월 후 저는 그 사람에게 건네준 책, "뉘앙스"의 북 토크쇼에 참석했습니다. 사실 참여할 이유는 없었는데,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집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마포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뉘앙스" 대신, 작가가 쓴 시집을 사인받으려 내밀었습니다.
 
"어? 시집 출간회가 아닌데 헷갈리셨나 봐요?"
"아니요. '뉘앙스'를 통해 작가님을 알게 되었고 몇 번을 읽었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가져오셨네요?"
"아.. 좋아했던 사람에게 빌려줬는데, 이제 멀어져서요."
"다시, 그 책을 보는 게 힘들어서.."
"..."
"이해해요, 그래도 덕분에 제 책이 제이님에겐 특별해졌네요."
"나중에 마음 가라앉으면 다시 보세요. 새로울 거예요."
"네..."
 
저는 짧은 모임을 끝내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봄 나를 설레게 했던 아름다웠던 눈빛, 그리고 애지중지 다뤘던 뉘앙스는 이제 없다. 그런데 무언가는 내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 이건 무엇일까? 그리고 그건 내게 어떤 의미일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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