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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꽃밭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작년 여름 제주시 한림수목원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을 찾아가던 대로변이었다. 보행자도로와 건물 사이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을 삐죽이 뚫고 붉은 접시꽃대가 몇 가닥 하늘거리고 있었다. 꽃을 일부러 보러 다닌 적이 없었다. 이렇게 접시꽃을 한 길가에서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우리들의 수필을 모아 「이 땅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만들어 우리에게 한 권씩 나눠 주셨다. 선생님은 철자가 틀린 글자를 그대로 두셨다. 대신 별도로 각주를 달아 어떤 단어였는지를 표시를 해 두셨다. 하얀 목폴라티에 양복을 입으시던 멋진 선생님이셨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선생님은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로 유명세를 타셨다. 우리 세대에게 접시꽃은 가슴 아픈 꽃이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접시꽃은 할머니의 꽃이다. 할머니는 대문 앞 담장에 접시꽃을 키우셨다. 담장보다 높게 올라온 접시꽃은 ‘꽃 병풍’ 같았다. 한 여름 내 생일날 기념사진의  배경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내가 볼 수 있었던 키 큰 꽃은 칸나(홍초)였다. 학교 화단에 칸나 구근을 심기도 했었다. 동네 다른 집에는 칸나가 있었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선택은 칸나가 아닌 접시꽃이었다.      


대문 앞 모서리의 세모난 자투리 땅이 할머니의 꽃밭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할머니는 이 곳에 꽃을 심으셨던 것 같다. 어린이인 나는 대면 대면 했던 곳이었다. 여름 끝자락 봉숭아 꽃을 따서 손톱에 물들이는 것도 심드렁했었다. 이 꽃밭 앞에 서서 꽃을 어색하게 잡고 찍은 사진 몇 장을 사진첩에서 찾았다. 등교 길에 개나리를 잡고 있는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새로 지운 한복과 곱게 따 내린 머리채에 댕기까지 하고 국화

꽃 앞에 서 웃고 있는 나는 기분이 좋았었나보다.     


봄의 개나리, 여름의 붓꽃, 백합, 봉숭아, 도라지꽃, 접시꽃, 가을의 달리아, 사루비아, 국화 정도를 사진첩과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이름을 모르겠는 꽃도 있다. 사진첩을 뒤적이다 할머니가 아예 꽃밭 안에 서 계신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배경은 같은데 사진의 주인공만 할아버지로 바뀐 사진도 있다. 부부가 각자 독사진을 찍으셨다. 같은 날 나는 꽃밭에 들어가지 않고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듯하다.       


새집을 짓고 나서 할머니의 꽃밭은 대문 밖에서 대문 안 새집 앞으로 이전했다. 여전히 그곳에서 나는 사진을 찍었다. 백합의 향이 지독하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진달래 화전을 만들지 않으셨지만 가을이 되면 국화잎을 따서 부각을 만드시긴 하셨다. 지금은 어떤 맛이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국화잎부각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국화잎은 한지 창호를 새 단장 할 때 문고리 옆에 데코레이션으로 창틀 사이에 붙이기도 했었다. 그것 말고 꽃밭의 용도는 없었다. 꽃을 꺾어 집안에 들이는 일도 없었다. 오로지 관상용이었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그냥 멀뚱하니 바라볼 뿐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어릴 때도 그랬을 텐데 할머니가 자꾸 꽃밭에 어린 나를 세워 두고 웃으라 했으니 웃을 리 만무다.      


요즘은 그래도 가끔 꽃 사진을 찍는다. 꽃만 찍는 거다. 꽃도 유행을 타는지 할머니의 꽃밭에서 봤던 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화훼단지에 가야 할머니가 심으셨던 꽃들을 볼 수 있으려나. 겨울이 되기 전 할머니는 꽃밭을 갈무리 하셨을텐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하시면서 언제 하셨을까. 할아버지가 해 주셨겠지? 어쩌면 할머니의 꽃밭은 할아버지의 선물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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