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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늙은 호박을 하나 얻었다. 친구네 텃밭에서는 처치 곤란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20여년 만에 만져 보는 늙은 호박이다.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니 돈 주고 사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호박고지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어떻게? 떡으로. 떡에 들어 있는 늙은 호박은 항상 달콤했다.      


할머니는 가끔 시루떡을 만드셨다. 쌀가루, 소금, 설탕으로만 만드는 떡이 설기. 쌀가루와 팥을 번갈아 쌓아올려 지층처럼 만들어지는 떡이 시루떡이란다. 할머니는 확실히 시루떡을 만드셨다. 우리 집에는 옹기로 만들어진 전용 떡시루가 있었다. 떡시루 아래 큰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는 무거운 물건이었다. 할머니는 옹기떡시루에 물에 적신 커다란 면포를 깔고 쌀가루를 한층 만들고, 그 위에 팥을 뿌리고 다시 쌀가루를 올리는 작업을 반복하셨다.     


떡시루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은색의 양은솥에 시루가 얹혀졌다. 꾸덕한 밀가루 반죽이 솥과 시루의 틈을 메워가며 한 바퀴 둘러졌다. 양은솥에 담겨져 있던 물이 설설 끓으며 나오는 수증기로 떡이 쪄졌다. 떡이 잘 익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기다란 나무젓가락이 등장할 차례다. 젓가락으로 떡시루 가운데를 푹 찔러보면 된다. 젓가락에 반죽이 묻어나오지 않으면 다 익은 것이다.      


다 된 떡은 떡시루를 거꾸로 들어 엎는다. 왜 떡은 유독 추운 날에만 했었는지. 떡시루와 분리된 커다란 떡 뭉치는 사방으로 뿌연 수증기를 뿜어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김이 빠지고 나면 번득거리는 식칼로 떡을 자르는 커팅식이 거행되었다. 흰색, 자주색, 흰색 자주색의 포슬포슬한 떡이 네모 바듯하게 모양이 잡혔다. 나는 팥만 떼어먹었다. 하얀 떡살은 왠지 질척하고 밍밍했다. 어린이 입맛은 어쩔 수 없었다.      


아주 가끔 호박고지가 들어간 떡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늙은 호박을 갈라보면 씨앗과 태좌(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씨앗과 호박살을 연결하는 끈적끈적한 물질)가 나온다. 씨앗과 태좌를 파내고 호박껍질을 벗긴 후 호박살을 길이대로 얇게 저며 말린 것이 호박고지다. 호박고지와 불린 검은 콩을 쌀가루에 섞어 찐 떡은 할머니가 만드신 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이었다.       


어릴 적 입맛이 무섭다는 것을 나이 먹어가며 깨닫고 있다. “세 살적 입맛 여든까지 간다.”라는 식이다. 떡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었다. 나혼자 먹자고 그 번거로운 일을 해 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내게 떡은 사먹는 음식이다! 맛있는 떡을 찾자!     


호박고지가 들어간 떡은 잘 구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멥쌀가루보다 찹쌀가루로 만든 쫀득거리는 떡 사이에 호박고지가 들어가 있었다. 멥쌀이면 어떻고 찹쌀이면 어떠랴. 모듬배기든 영양찰떡이든 ‘노오란’ 호박고지가 들어가 있는 떡은 눈에 보이면 족족 장바구니에 담았다.      


20여년 만에 늙은 호박이 생겼다고 해서 당장 떡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도 뭔가는 해 보고 싶어 호박전과 호박죽을 만들었다. 늙은 호박전은 난생처음 먹어봤다. 애호박전과는 사뭇 다른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부라보!! 호박죽은 죽이라기보다는 따뜻한 쥬스처럼 만들어졌다. 다음에는 더 되직하게 만들어야겠다.        


늙은 호박은 깍둑썰기와 납작썰기를 해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죽도 만들고 된장찌개와 카레에도 넣어보려 한다. 늙은 호박. 든든한 식재료다. 아무래도 아직 떡은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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