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참외가 할머니께서 좋아하셨던 과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할머니가 천안의 요양원에 계실 때 였던 것 같다. 그 때부터 참외를 볼 때면 할머니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할머니가 어떤 음식을 두고 당신이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전혀 없다. 즉 할머니의 최애 음식을 나는 모른다. 안다는 것이 참외뿐이다. 그러니 참외가 나오는 철이 되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입맛을 항상 살피셨다. 할아버지가 드시고 싶다고 하시면 홈메이드 두부도 뚝딱, 돼지고기 두루치기도 뚝딱 나왔다. 제사를 지낸 후 다음 날은 제사상에 올라갔던 조기가 양념조림으로 밥상에 올랐다. 할아버지용 스페셜 반찬이었다. 할아버지가 육회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산에 두분이 사실 때 할머니는 정작 당신은 드시지도 않는데 할아버지가 좋아하신다며 육회를 무치셨다.
할머니가 무척 신경을 쓰셨던 또 다른 음식은 나의 도시락 반찬이었다. 고기 반찬이나 개구리 반찬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내 도시락 반찬의 다양성을 유지하시느라 애를 쓰셨다. 계란말이, 단무지무침, 멸치볶음, 감자채볶음, 감자조림, 진미채무침, 김구이, 무말랭이무침, 콩자반, 상어고기조림. 그 때 그때 집에 있는 반찬 중 제일 맛난 것으로 번갈아가며 최소 3가지 이상의 반찬을 담아주셨다.
중학교 때 싸 주셨던 상추쌈 때문에 오후 첫 수업시간에 졸아버린 나는 고등학교 때 까지 상추를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다. 겨울이 되어 보온도시락을 들고 다니게 될 때는 뭐라도 펄펄 끓는 국물을 맨 아래 찬통에 담아 주셨다. 뜨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시락의 하이라이트는 언젠가 할머니가 직접 배달해 주신 국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 담장 사이로 국수가 담긴 냄비를 건네 주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극성이셨다 싶다. 냄비를 들고 국수 불지 말라고 얼마나 총총거리며 걸으셨을지 눈에 선하다.
막내이모에게 물어보면 할머니가 좋아하셨다는 음식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할머니 스스로 요리를 하실 수 없을 때 외식 메뉴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실 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음식 장만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동태찌개에 들어 있던 물고기의 머리도 할머니는 호불호를 내색하지 않으셨다. 도대체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작년 이맘때 집 근처 식료품점 앞에 홍보용으로 참외 사진이 붙어 있었을 때부터 참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참외는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과일이다. 참외는 사진만 봐도 할머니한테 미안하다. 할머니한테 참외를 사드린 적도 없다는 기억으로 더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