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시, 그 중심에 서서 사람을 외치다

[도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by 샘바리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보고 시인과 철학자는 정반대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시인이라면 함축적, 감각적, 독창적, 주관적인 단어를 통해 사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그려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시적인 언어는 서정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주관적인 리듬을 지니며 '정서'를 상징한다. 반대로 철학자라면 논리적, 이성적, 분석적, 객관적인 단어를 가지고 사물이 지니고 있는 법칙을 날카롭게 재정립하여 독자에게 선물한다. 철학적인 언어는 타당성을 추구하며 개념을 창조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며 '사유'를 의미한다. 이렇게 양 극단에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철학과 시는 결코 대척점에 있지 않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다른 스타일로 건네는 것뿐이다. 둘 다 사람을 향하고 있는 인문학에서 중요하며,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신선한 충격을 선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사유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며 이성과 감성, 객관과 주관의 조화로운 힘이 가장 필요하다.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푸코와 김수영', '니체와 황동규', '벤야민과 유하' 등 시인 21명과 철학자 21명의 반가운 만남이 담겨 있는 이 책은 한 편씩 읽기도 좋고 참고 문헌과 시 출처를 보기 좋게 모아두어 더 많은 생각거리를 얻고 싶은 이들에게 매우 좋은 지침서가 된다.



○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중략)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시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도 오래도 살아남은 '개' 같은 관료를 조롱한다. 식인종이 쳐들어와도 관리 생활을 할 거라고 말하는 정도이니 관료에 대한 시인에 생각은 단호하고 비판적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그런 관료가 수두룩하다. 일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줄 알았지만 약자를 괴롭히던 자의 이름이 '나카무라 OOO'에서 '김 XX'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이라는 매우 긍정적이고 훌륭한 덕목을 지녔지만, 관료는 시인에게,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비판을 받는 존재다. '거짓, 나태, 게으름, 불공정'이라는 누가 봐도 부정적인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일까? 그 궁금증에 대한 자세한 실마리는 철학자 아렌트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이 결여된 채 '무사유'로 일관했던 관료의 행동 때문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유대인 아렌트가 나치즘을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그 문제점과 기원을 밝혀내려고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이성'이 가진 동일성에서 시작된 거라고 주목하였듯이, 아렌트는 '무사유'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1963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펴냈던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밝혔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렌트의 책 속에서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은 영화나 책에서 악랄하게 그려지는 철저한 악의 결정체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히만은 규칙에 복종하는 평범한 독일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백만 명을 아무 이유 없이 학살한 파렴치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는 그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물어 그의 악함을 꼬집는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 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아이히만은 그의 선택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을 불행에 공감하지 못했고, 자신이 서명한 한 장의 서류가 불러온 비극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는" 아이히만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기계적으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고, 앵무새처럼 지시 상황을 주절거리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시자가 누구냐에 따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아이히만은 지시를 내린 이는 히틀러였다. 문득 글을 읽고 나니 '정치인이 가장 다루기 쉬운 대중은 열광적인 찬성도, 격렬한 반대의 뜻도 아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 '사유'는 권리인가 의무인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
- <살인의 추억> 中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범이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는 어린 꼬마의 한마디로 마무리된다. 우악스럽거나 악랄하고 무섭게 생긴 게 아니라 그저 길을 걷다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얼굴. 이렇게 악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숨어 있다. 그리고 어느샌가 진짜 모습을 드러낼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법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모든 사건을 바라본다면 '착하고 평범하며 모범적인' 우리도 역사를 뒤바꾸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분업화, 전문화가 진행되어 개인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닭장같이 빽빽한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요즘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을 하며 관련 없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쿨함'이 대세다. 이러한 사유는 '아이히만'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생각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태에 한발 물러나 내 책임이 아니라고 고개 돌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리를 높이며 관심을 둬야 한다. 만약 내가 약자의 처지에서 고통받을 때 모두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쿨함'이 아니라 '비겁함'이라 울부짖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해질 필요가 있고 조금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항상 반성하며 비판적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이 일로 인해 누군가가 겪게 될 고통, 불행에 공감해야 한다. 내 작은 행동 하나, 아니 근면하고 성실한 행동이 어마어마한 파장으로 타인을 고통의 나락에 빠트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며. 이왕이면 나의 기쁨은 타인과 함께 배가 되고, 나의 슬픔은 타인과 함께 반이 된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 항상 따뜻한 마음, 차가운 머리를 기억하며 능동적으로 살아가야겠다. 우리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깐 말이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1961년 법정에서 나치 정부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칼 아돌프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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