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개구리가 우물을 기억하는 법, 김리뷰
1달 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 만나자
- 김리뷰의 '리뷰 공화국 멸망 리뷰' 中
다음 카페에서 '당신의 리뷰가 세상을 바꿉니다'란 거창한 설립 목적이 빛나던 '리뷰 공화국'은 말그대로 망했다. 스폰서 유치에 난항을 겪으며 결국 돈이 다 떨어졌고,뻘글부터 주옥같은 글까지 활발한 참여를 불러일으켰지만 다음 카페 특유의 불편한 인터페이스 때문에 아쉬움도 많았다. 그리고 현재 최신글은 '★하루 두세시간 짬나는시간 아르바이트', '허리통증, 자세교정에 관심있으신 분들 꼭 보세요.' 등이 전부다. 하지만 이런 당돌한 시도는 2보 전진을 위한 0.5보 정도 후퇴의 과정이었다. '리뷰 공화국'을 운영하던 리뷰왕 김리뷰는 본입답지 않게 정중한 청년창업가마냥 스토리펀딩을 요청했다.
'리뷰공화국' 카페에서 영화 리뷰를 쓰며 사람들의 소소한(?) 댓글과 미미한(!) 조회수에 즐거워하던 나는 그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자금이 없는 예술가나 사회활동가가 자신의 창작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을 조달한다는 '크라우드 펀딩'. 영화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거나, 소소한 선물을 주는 게 전부라 생각했던 나는 난생 처음 돈을 여기에 지불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콘텐츠도 돈을 지불해야한다는 지극히 기초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허무맹랑한 이념에 이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은 들지 몰라도 돈은 그다지 들지 않는 가성비 갑 취미인 '글쓰기'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상당히 매혹적인 사이트였다. 그저 11.700원이면 주고 살 수 있는 책을 무려 10만원을 투자하고 구매한 건 그동안 페이스북에서 낄낄거리며 읽었던 리뷰의 감상료 정도라 갈음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언젠가는 오겠지, 거창한 사이트도 곧 열리겠지, 하다가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바보같이 예전 주소로 축구화를 주문해서 이사한지 2년 만에 그리운 아파트를 찾아간 날 불현듯 떠올랐다. 김리뷰 책도 예전 아파트로 가면 어쩌지? 멍청함의 대명사 고라파덕도 이러진 않겠지 자책하며 리뷰왕 김리뷰에게 용기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무려 48만명의 팔로워, 총 조회수 3억 뷰를 자랑하는 네임드 페이지 주인장은 하루도 되지 않아 칼답장이 왔다. 사실 칼답장이 아니었다면 '먹튀+잠수' 테크트리에 속았다고 생각해 '중고나라 피해자 모임' 따위를 기웃거렸을 수도 있었다. (미안. 10분 정도 의심했다.)
나의 순진한 우려는 기우였고, 애초에 배송조차 시작하지 않았더라. 마감 직전 리뷰를 토해낸다는 그의 느긋한(?) 성향을 미처 알지 못한 나의 부덕의 소치였다. 그리고 서랍장에서 고이 모셔둔 발열 내의를 꺼내 입을 때 딱 맞춰 묘령의 택배가 왔다. 뜯어보니 <개구리가 우물을 기억하는 법>이 담겨 있었다. 알아보니 7월에 새로 출간된 김리뷰의 새로운 책이었고, 약속된 리워드도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리뷰 공화국> 머그컵에 따르고 책상 앞에서 새책을 펼쳤다.
<개구리가 우물을 기억하는 법>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 한다."는 대표 속담을 전면으로 부정하기 위한 김리뷰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개구리'들은 힘들고 처절했던 지난 '올챙이' 시절 이야기를 애써 모른체 한다. 잘나가는 현재와 너무나 다른 구질구질한 과거를 떠올리기 싫거나. 혹은, 본인의 성공담을 더욱 극적으로 꾸며내기위해 억지로 끄집어 낸다. 이런 반강제(?) 기억상실증은 사회적 분위기가 큰 영향을 끼친다. 마치 가난은 '노----오력'이 매우 부족한 이들의 산물이며, 헬조선 사회가 훨씬 더 악랄하면 '흙수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전적 에세이를 읽다가 어느순간 감정선이 '놀라움→부러움→자괴감'으로 빠지곤 한다. 하지만 김리뷰의 <개.우.기>(책 이름이 너무 길다.)가 부담없이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억지 포장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힘, R=VD 따위의 주술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혹은 위트있게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내기에 오히려 이런 츤데레한 문장들이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온다. "흙수저에서 도자기수저로", "가난, 개미지옥", "노예의 정서", "홀로서기" 4개의 챕터에서 영화, 감정 기복, 눈치, 정신병, 커피 등 본인의 소소하지만 인상적인 썰들을 풀어 놓는다.
1억짜리 롤렉스 시계, 삐까뻔쩍한 롤스로이스, 영롱하게 빛나는 금불상 목걸이. <나혼자 산다>에 나오는 래퍼 도끼의 스웩은 부럽기는 하다만 사실 크게 와닿지가 않는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은 '노------오력'으로도 만져볼 수 없을 아예 다른 세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성공에 시기와 질투가 뒤따르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김리뷰의 소소하고 잔망스러운 스웩은 충분히 공감가고 가슴에 와닿는다. 코비 은퇴 시즌에 맞춰 나온 한정판 농구화, <롤러코스터 타이쿤3> 실행과 동영상, 인터넷을 동시에 해도 버벅거림이 전혀 없는 새 컴퓨터, 분당 2만번의 진동을 한다는 편하고 개운한 전동칫솔. '생존'의 단계에서 이제는 선택지가 넓어져 '취향'을 고려할 수 있는 김리뷰의 이야기는 가볍지만 진솔하다. 그의 허세 섞인 스웩이 꼴사납지 않았던 이유는 차분한 고백때문이다. 사실 본인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 타인에게 털어놓는 건 엄청난 결단력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는 복지카드로 하루하루 정해진 금액 만큼의 메뉴를 연명하거나, 몸에 안 좋다는 걸 알지만 가장 싸고 맛있는 양식인 라면을 질리도록 먹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머니와 단둘이 복지관에 살면서 X컴퓨터 앞에서 힘겹게 게임을 했다. 싸구려 야구글러브로 캐치볼을 하려다 피를 봤으며, 흰색 새신발을 신고 당당히 등굣길에 나섰다가 헌신발로 변해버려 좌절했다. 사실 이런 가난의 영역이야 그나마 양반이다. 어린 나이부터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거나, 항우울제, 신경안정제 등을 먹으며 태생적인 감정기복을 다스린다는 비밀도 (남의 일처럼) 털어놓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본인에게 매우 아무렇지 않은 문제들을 말이다. 그리고 일베 유저였단 사실도 멍청하고 어리석었다며 인정한다. 무결점 사나이의 흙수저 탈출기가 아니라 여전히 단점도 많고 부족함이 많은 한 인간의 중간 정산 정도로 보면 거부감이 덜할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하고, 모두가 후회는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고쳐 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건 '아무나' 하진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절약 - 모아서 태산이 되는 건 빚뿐이었고"가 가장 인상적인 챕터였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체득한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가 있다. 뭐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덕은 '돈'은 약간 비껴간다.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지가 넓어지고 삶의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하며 확실히 가족간의 정도 더욱 돈독해진 느낌이다. 내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웰빙'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니 고마운 일도 많아졌다. 미안한 일보다 고마운 일이 많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에 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돈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한 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돈이 없어서 생기는 여러가지 불화와 다툼은 피할 수 있다. 그래서 내린 체득한 나의 명제는 아래와 같다.
돈은 행복의 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필요 조건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말 잘듣고 싹싹한 아들이었지만, 엄마 앞에서 울고불고 성을 냈던 기억이 있다. 딱히 뭔가를 사고 싶어서도 아니었지만, 그냥 나중을 위해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예를 들면 대학생의 로망 배낭여행이라든지, 선수들이 직접 입는 어쎈틱 축구 유니폼 따위를 떠올렸겠지. 막상 돈을 꽤 모아도 신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큰맘 먹고 지를 용기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카드값을 메꿔야했던 엄마가 말없이 그걸 꺼내쓴 걸 보고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거 아닌 일이었는데 왜그리 모질게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미안하다. 약간의 알바비가 더해졌지만 그래봤자 부모님 용돈이나 명절 세뱃돈을 모은 거라 어차피 왼쪽 주머니에서 나와 오른쪽 주머니로 가는 법인데. 어렴풋이 그때의 내가 받은 상처, 내가 드린 상처를 떠올리며 '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김리뷰의 말처럼 '절약 대신 필요'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개.우.기>를 읽는 내내 편했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이가 나혼자가 아니란 걸 느껴서. 절대 밝은 표정으로 살갑게 응원하진 않지만, 나보다는 나은 병신이 되길 바란다며 시크하게 어깨를 툭 쳐주는 느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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