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무엇이든 쓰게 된다, 김중혁
'첫 문장을 잘 쓰고 싶었다.'라고 자연스럽게 첫 문장을 썼지만, 여전히 어떤 글이든 시작은 어렵다. 첫 문장만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김중혁이라면 묘한 비기, 아니 자연스러운 꼼수를 알려줄 것 같았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알 수 있듯이 손꼽히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란 부제를 보고 기대치를 낮췄다. 영업비밀인 엄청난 비기를 쉽사리 알려줄 리 없고, 어마어마한 필력이 얇은 책 한 권에 요약되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김중혁 작가는 솔직하게 그런 신의 한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그나마 비법이라면 일단 무작정 쓰는 행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대화를 상상하는 힘’이 개성을 만드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소설을 쓸 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글쓰기에 적용되는 말이다. 대화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고, 두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화를 상상하다 보면 점점 가상의 인물들이 늘어난다. 처음엔 두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다가 어느 날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머릿속 가상의 인물이 점점 늘어난다. --- p.108
결과물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도 창작의 세계로 뛰어든 순간 그건 바로 사랑스러운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나는 농담이다>, <악기들의 도서관>등을 펴낸 흑임자 김중혁 작가는 김천 3인문(김연수, 문태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온갖 잡다한 음악, 그림, 스포츠, 영화, 전자제품, 심지어 공장까지 관심사가 다양한 그의 글솜씨 비결은 '다작'이다. 단편, 장편, 수필, 심지어 만화를 넘나들며 쉬지 않고 색다른 창작물을 토해내는 김중혁. '성실함'이 훌륭한 작가의 척도 중 하나라면 그는 확실히 훌륭하다. 팟캐스트, TV 예능 프로그램, 북콘서트 등 쉬지 않고 일하는 그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낀다. (천재 예술가는 게으르다는 건 그냥 편견 같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그동안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한 그의 자서전이자, 제법 매력적인 창작 노트를 공개하는 기회였다.
책이란, 대화의 시작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오래된 문장을 읽고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 묻고 내가 대답한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책 속에 숨어 있다. 글쓰기는 가장 적극적으로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수많은 책들을 읽은 후 자신의 생각을 책에다 적는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내 이야기를 섞는 것이다. --- p.278
그는 쉴 새 없이 메모를 붙이고, 화이트보드에 관계도를 썼다 지우고, 아이패드, 아이맥, 독서대 등 다양한 사물을 활용해 쓰고 또 쓴다. 마감에 시달리지 않을 때는 늘어져라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리프레쉬 방법이란다. 물론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라 상세하게 '관찰'하며 익숙한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유쾌한 표현과 독창적인 시각의 비결이었다. 세상을 관찰하고, 동시에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산책은 당연히 좋은 취미다. 힘을 약간 빼야지 진정한 창작이 가능하다는 의미에 무척 공감이 갔다. 방학숙제로 내야만 하는 일기, 20권을 채워야만 하는 독후감 등 글쓰기에 '의무'라는 굴레가 써지는 순간 재미는 순식간에 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시 정리해보는 이런 포스팅은 훌륭한 취미이자 창작 활동의 밑거름이 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자주 우울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 험해지고 거칠어져야만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거칠어지다가 우리는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문득 돌아봤을 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모래뿐이지 않을까. 뭔가 중요한 걸 꽉 움켜쥐고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쩌면 바스라지는 흙덩어리 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좀 더 창작에 몰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거칠어질 수 없다. 강해질 수는 있어도 험해지지는 않는다. --- p.284~285
뻔한 글을 쓰기 싫어하는 모든 작가의 특성대로 김중혁은 이번 책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했다. 마치 수능 문제를 풀듯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꾸며보는 구성도 신선했다. 명쾌한 정답과 재치 있는 오답을 오가며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볼펜, 샤프, 전자기기 등 자신의 시행착오가 담긴 글쓰기 도구들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팔로미노 블랙 윙 연필, 페이퍼 53 펜슬, (최고라고 손꼽는) 애플 펜슬, ACE 독서대, IBM 싱크패드 등. 세심하게 그림으로 구현해낸 제품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뭔가라도 끄적여 보고 싶어 진다. (X손인 나는 그의 훌륭한 만화는 따라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머리를 띵하게 만들 비법 전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서인지, 여러 편의 소설과 에세이로 김중혁 표 유머에 길들여졌는지.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나름대로 재밌고 유익했다. 글쓰기 테크닉이나, 실질적 조언의 측면이 아니라 '글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 측면에서 말이다.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엄청난 걸작을 써 내려갈 책임도 없다. 그저 자기 생각을 마음껏 쓰는 것 그 자체가 글쓰기의 매력이다. 홍콩 여행 중에 읽으려고 마음먹었던 책이지만 5시간 연착이라는 비극 때문에, 혹은 기회 덕분에 홍콩에 도착하기도 전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다행히 여행 내내 글을 쓰고 싶단 의욕을 불태웠고, (매번 그렇듯) 새해를 굳센 다짐과 함께 맞이할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 '글을 쓰듯 말을 하고, 말을 하듯 글을 쓰는' 수잔 손택의 경지에까지 오르길 기대하면서 묵묵히 쓰고 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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