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누비는 미국산 모두까기 투덜이 할아버지

[도서]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by 샘바리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치밀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준비성 강한 성격도 아니고, 여행기를 너무 많이 읽다 보면 애초에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기다리던 영화의 스포일러를 들어버린 기분이랄까? 기대와 설렘이 정점을 찍고 나면 어느 순간 여행지를 벌써 다 둘러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극적인 에피소드를 예술적인 글솜씨로 생생하게 그려내면 부러움도 생긴다. (특히 내가 찍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환상적인 사진들이 담긴 포토북을 보면 더 심하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다녀와서는 내가 직접 다이어리에 느낌을 쓰지, 남의 감상을 훑어보며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여행책을 고를 때면 자연스럽게 추천 2박 3일 여행 루트나 생생한 전문가 맛집이 정리되어있는 정보 전달 목적의 책을 살펴보곤 한다. 이렇듯 나는 감성 에세이 스타일의 여행기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별로 없다.


Bill-Bryson-hike.jpg


하지만 감성과는 제법 거리가 먼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다르다. 일단 오슬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등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유럽 여행지가 나온다. 막연히 유명한 도시를 가보고 싶단 생각은 들지만, 현실적으로 훌쩍 떠날 수도 없기에 그냥 책으로 읽어보며 대리 만족했다. 확실히 큰 기대 없이, 어차피 가볼 일 없는 여행지라 생각하고 읽으니 참 유쾌했다. 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고 여행 플래너에 꼼꼼하게 옮겨 쓸 필요도 없고, (한동안 가볼 가망이 없으므로!) 내용을 읽고 낡은 서랍 속에서 예전 사진들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므로!) 그저 불평불만 가득한 투덜이 스머프 같은 배 나온 미국 아저씨의 유머만 즐기면 된다. 물론 그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유럽 곳곳에 특색 있는 '도시'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지만, 어째 비슷비슷한 느낌도 받는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싸우고, 불평하고, 따지고.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거치기 때문이다.


시계가 4시를 치자마자 여행사에 들어섰더니 항공사 예약 창구에는 다른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내가 정황을 설명하자 여직원은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나 훑어보았다. 잠시 후 하는 말이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단다. 나는 직장에서 잘리고 차도 도둑맞았는데 아내가 제일 친한 친구와 도망간 사실을 방금 알게 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여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여직원이 이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저녁 비행기 좌석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니 상관없다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뭐, 뭐라고요?"

여직원은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피아행 비행기 표는 112달러란다. 그걸로 하겠느냐고? 내가 비행기 표를 원했느냐고? 교황이 천주교냐고? 베티 포드가 병원이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당장 하나 주시죠."

- 유고슬라비아


20170322_102315.jpg 지상낙원 몰디브.


책을 읽다 보면 절반이 호텔에서 바가지요금을 가지고 싸우는 이야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마다 맞이하는 지옥 같은 줄 서기에 대한 불만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럴 거면 왜 여행을 하는 거지?"란 본질적인 물음이 들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여행 정보가 아닌 여행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라는 책 소개가 딱 들어맞는 솔직한 책이었다. (아, 적어도 어떤 도시를 피해야 하는지는 120% 알 수 있다.) 함메르페스트부터 이스탄불까지 부지런히 오다니면서 빌 브라이슨의 퉁명스러운 유머는 빛을 발한다. 예를 들면 리히텐슈타인의 군대 이야기라든지, 소피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유머라든지, 혹은 웨이터를 살려주며 영웅이 된 로마의 에피소드라든지. (특히 식당 자리가 모자란 로마의 에피소드는 정말 재밌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가운데,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상황을 상상한다.)


웨이터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손님들을 더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돌포는 똘마니에게 다시 한번 뭔가 귀띔했고, 똘마니는 자리르 떠났다. 기관총을 가지러 갔거나 불도저로 입구 쪽 벽을 밀고 들어오려나 보다.

"스쿠지(실례합니다)."

이날은 이탈리아 어가 좀 됐다.

"제 테이블을 쓰시지요. 전 이제 나갑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고, 잔돈을 챙긴 다음 일어섰다. 매니저는 내가 목숨이라도 건져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웨이터는 내 입술에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키스 대신에 '그라치에(고맙습니다)'만 연발했다. 내 평생 그 같은 인기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웨이터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고 식당 안의 다른 손님까지 나를 존경하는 눈길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돌포까지도 고개를 살짝 까딱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로마


IMG_0712.JPG LA의 멋진 야경.

그는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눈길이 강한 남자다. 그는 나치즘을 도운 발트하임을 떡하니 대통령으로 선출한 오스트리아를 조롱한다. 공산주의가 저물어 가는 소피아도 냉정하게 바라본다. (물론 그러면서 그들의 변화 이전의 공간을 다녀왔다는 데 만족감을 느낀다. 전형적인 츤데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까기'의 대표 주자 빌 브라이슨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외치는 미국 찬양론자도 아니다. 맥도널드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비판이나, 획일화되는 미국에 대한 냉소를 보면 그의 화살이 아군, 적군이 따로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여행을 가지도 않은 일본을 까는 부분도 있다.) 간혹 여행기를 보면 GDP따위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막연한 동점심을 갖는 스토리가 제법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맥도널드 임직원들은 유럽이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적당한 골목에 점포를 내도록 하고,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기능에 걸맞으면서도 좀 덜 튀도록 점포를 꾸며야 한다. 외관은 유럽의 보통 비스트로처럼 보여야 한다. 가령 붉은색 커튼이나 장식용 수족관 정도만 써야지, 창문에 새겨진 맥도널드의 노란 엠(m)자와 거대한 엉덩짝을 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빼고는 밖에서 봐서 맥도널드라는 표시가 나서는 안 된다. 말이 난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맥도널드는 뚱보만 양산하고 건강에 나쁜 지금의 메뉴는 더 이상 팔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발 로너드 좀 치워달라고 누가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맥도널드는 이런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을 때에만 유럽에서 영업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

- 오스트리아


IMG_2720.JPG 알콜과 거리가 멀지만 분위기에 취해 한잔. 발리 스미냑!


반복된 불평불만이 사실 조금 지루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글이 재밌고, 읽기 쉬운 데 비해 의외로 책을 끝까지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가본 도시라면 더 공감하고, 재밌게 함께 욕하면서 봤을 텐데. 하나도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라 사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쓰고, 저널리즘 글쓰기에 익숙한 그의 깊이를 따라가기엔 배경 지식이 미천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발칙한 유럽산책>은 소설보다 더 가볍고 유쾌하다. 그렇다고 밝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여행 막바지에 갑자기 훈훈하고 따뜻한 결말을 읽는 순간 책을 읽는 내 여정도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아니. 이게 무슨 뒤통수 때리는 결말인가! 쉼 없이 전방위로 폭격을 퍼붓던 불평쟁이가 갑자기 회한에 잠기며 집에서 자신을 반길 가족들을 떠올리다니.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런 따뜻한 마무리도 그리 나쁘진 않다. 여행하다 보면 결국 매번 느끼는 감정은 '역시 집이 최고야'란 것 아닌가? 이국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신선함에 즐거워하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이 익숙한 공간이 그리워지는 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일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엔 역설적으로 돌아오는 게 정해져 있기에 더욱 즐겁고 낭만적이며, 흥미진진하다.


여행이 길어져 체류가 된다면 어느덧 그것이 일상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법이다. 그나저나 빌 브라이슨이 한국에 온다면 어떤 글을 쓸지 갑자기 궁금하다. 믿을 수 없이 빠른 인터넷, 깨끗하고 치안 걱정이 없는 밤거리, 아름다운 곡선이 살아 숨 쉬는 한옥일까? 아니면 집에 우환이라도 있는 듯 굳은 얼굴도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 외국인을 보면 일단 경계하고 보는 배타적인 마음, 그저 미친 듯 맵고 짠 음식일까? 때론 이방인이 보는 우리의 밑 낯이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보나 마나 빌 브라이슨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는 없지만 말이다.



799.JPG 평화로운 소도시 이탈리아 아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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