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결국 의사도 희망이 필요한 존재였다.
제목부터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숨결이 바람 될 때>. 이 책은 36세 외과의의 안타깝지만 고귀한 암 투병기다. 하지만 단순한 암으로 고통받고 죽음에 굴복하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 '희망'을 찾아 나서는 용기 있는 2년 간의 기록이다. 모든 질병, 죽음에 경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자 폴 칼라니티의 폐암 4기 판정은 너무나 아쉽고 슬프다. 그는 많은 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의사'였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에 명예로운 직업이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충분히 대우를 받아야 하는 법이다. 그는 조금 덜 힘든 전공을 택하기보다는 철저히 본인의 적성과 성취를 위해 신경외과를 택해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리고 하루 열네 시간이 넘는 고된 일정이지만 신경외과 레지던트도 졸업을 1년 앞뒀고, 훌륭한 실력을 인정받아 교수 자리도 고르고 있었다. 탄탄대로 장밋빛 인생은 그가 기계적인 수준으로 자주 고쳐냈던 암세포에 산산조각 났다. 평범했던 일상은 엄청난 노력과 행운이 따라야 하는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는 의사이자 환자였고, 남편이자 아빠였다. 그는 죽음을 격렬히 거부하거나, 삶의 활력을 포기해버리지 않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섰다. 끝까지 다시 수술을 하기 위해 치료 방법을 고민 끝에 선택했고, 실제 온 힘을 다해 수술대 앞에 서기도 했다. 단순히 직업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나에게는 '소명 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그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학부시절 영문학을 전공하고 철학, 문학, 과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이과/문과로 나뉘어 철저히 다른 노선을 가는 한국과는 달리 그는 과학적으로 남은 삶을 계산하고 문학적으로 본인의 감정을 담담히 적어갔다. 삶과 죽음의 의미, 남은 자와 떠나는 자, 본인 직업에 대한 기억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또 곱씹어봤다. 그리고 그런 숭고한 결과물을 체력적인 부담이 큰 와중에도 쓰고 또 써 내려갔다. 힘든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고마운 이들에 대한 표현을 잊지 않았던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에게 '글쓰기'가 희망의 증거였다면, 희망의 원천은 두말할 것 없이 '가족'이었다. 레지던트 생활을 같이 하는 아내와의 다툼으로 힘들어했지만 암 투병이 오히려 둘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감을 선물했다. 둘 다 병에 대해 전문적으로 더욱 잘 알기에 서로를 배려하고, 조언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뿌리 깊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마음은 아이를 통해 흔적을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아무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칼라니티는 죽음이 코앞에 왔다는 사실까진 이해했고 고민 끝에 새로운 생명을 낳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무척이나 이상적이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나란히 서서 따뜻한 말은 전하고, 마지막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안아보고, 천천히 지나온 36년의 인생을 돌이켜 보는 순간은 감동적이고 경건했다. 출생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본인의 죽음은 조금이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만약 내 숨결이 바람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이렇게 축복 속에서 떠나고 싶단 욕심도 생기더라.
결국 그는 존엄하게 마지막 숨을 내뱉고 하늘로 떠났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마지막 챕터는 가장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고 사랑했던 아내 수잔이 완성했다. 너무나 담담하고 결연하기에 더욱 슬픔은 극대화됐다. 슬픔의 깊이가 단순히 표현의 정도로 어림할 수 없단 걸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남은 그를 가장 닮은 아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하는 내용은 빠르게 읽으래야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슬프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 <숨결이 바람 될 때>
공교롭게도 책을 읽을 무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한 목소리와 푸근한 웃음을 동시에 지닌 큰 분이셨다. 신기하게도 명절 차례를 마치고 외가에 가면 덩치 큰 장사들이 씨름판에서 힘을 겨루는 백두급, 한라급 경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직사각형의 'GOLDSTAR' TV에는 씨름만 나오기로 정해진 것처럼. 해가 다르게 조금씩 커가는 나를 보며 언제쯤 씨름해서 이길 수 있겠냐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외할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셨다. 수척해진 볼과 어눌한 말투는 시간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 이런 거창한 수사가 떠오르지 않고 그냥 불쌍했다. 아파하는 외할아버지가 불쌍했고, 곁에서 수발하느라 고생하시는 외할머니도 불쌍했다. 매번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먼 외가에 찾아가지 못했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큰맘 먹고 내려갔다. 그리고 내 기억 속과 너무나 다른 외할아버지를 꼭 안아드리고 손을 주물러드렸다. 그게 내가 본 마지막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랑스러웠고 존경스러운 분이 떠났다. 이번 설에 내려가지 않았더라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는 소중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후회와 아쉬움만 남기지 말고 더 표현하고 다가가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에 태어날....지 모를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
- 구매정보 : https://coupa.ng/by5daA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