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다리를 건넌 곱슬아,
산책 가자!

[도서] 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by 샘바리
나는 언제나 나의 늑대 형제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브레닌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가르쳤다. 재주를 가르칠 필요는 전혀 못 느꼈다. 자기가 바닥에 뒹굴고 싶지 않는데 내가 왜 그것을 시켜야 하는가? 심지어 브레닌에게 바닥에 앉으라고 시킬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앉건 서건 그것은 브레닌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나란히 걷는 것은 이제 당연한 행동이 되었다.


loon71_6085751529.jpg 철학자 마크 롤랜즈와 브레닌


나는 강아지를 두 번 키웠다. 지금도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산책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쉽사리 강아지를 다시 키울 자신이 없다. 정들었던 존재, 나를 따르던 동물과의 이별은 너무나 슬프기 때문이다. 차라리 본능에 따라 어디론가 떠나 버린 강아지는 잊을만했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영화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늘 지나던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경우는 달랐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긴 했지만, 밤새 펑펑 울면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단순히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강아지와 함께한다는 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매일 산책 나갈 여유도 없으면서 마냥 퇴근하고 날 기다릴 녀석에게 미안할 것 같더라. 쉽게 말하면 <철학자와 늑대>의 마크 롤랜즈처럼 브레닌과 11년간 진지한 교감을 주고받을 자신이 없었다.


늑대는 말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이해하기도 쉽다. 늑대들이 못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늑대는 문명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다. 늑대도 개도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hoto-1489440543286-a69330151c0b.jpg 세상에 나쁜 강아지는 없다. (출처 : Patrick Hendry / Unsplash)


너무 완벽해서 살짝 재수 없는 마크 롤랜즈. 잘 나가는 미식축구 쿼터백, 명문 대학 엘리트 교수, 아마추어 복싱 고수 등 은근히 자기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게다가 술도 잘 마시고! (게다가 책까지 재밌다. 은근히 깨알 같은 유머가 숨어있다.) 물론 자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96% 혼혈 늑대개 '브레닌'이 있었다. 브레닌은 수업 시간이 지루할 때면 큰소리로 하품을 하고, 야생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조금씩 적응해나갔다. 중간중간 칸트, 서양 철학 전반의 대립에 대한 설명도 등장한다. 하지만 철학과 졸업생인 나는 난해한 <존재와 시간>, <법철학>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레 철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간단한 설명은 그리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늑대개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댕댕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경기에서 누가 MVP였건 상관없이 브레닌이 옆에 있으면 그 사람이 MVP였다. 나는 경기장에서는 어림도 없었지만, 브레닌 덕분에 언제든 MVP가 될 수 있었다.


photo-1510337550647-e84f83e341ca.jpg 산책하러 가자 댕댕아! (출처 : Andrew Schultz / Unsplash)


책을 읽는 내내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 '곱슬이'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비 오는 오후에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길을 잃은 듯한 잡종개, 흔히 말하는 똥개였다. 갈색 털은 빗물에 젖어 축 늘어졌고, 흙탕물이 번진 몸은 지저분했다. 반장인 나는 묘한 의무감 약간과 아이들의 걱정을 덜어줄 알량한 리더십으로 무작정 강아지를 교실로 데려왔다. 내 손으로 강아지를 만진 건 처음이었다. 우선 급한 대로 화장실로 데려가 대충 구정물을 씻겨줬다. 그러던 중 수업 종이 치자 부랴부랴 커다란 청소함에 억지로 강아지를 숨겼다. 얼른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놀 생각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대담한 숨바꼭질은 금세 들통났다.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멍멍'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으니깐.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여운 발상이다. 낑낑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왈왈 짖는 강아지를 어떻게 수업 내내 조용히 숨길 수 있겠는가? 브레닌 옆에서 마크 롤랜즈가 자신감이 넘치듯, 나도 강아지와 함께면 주인공이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뜬 강아지를 한 번씩 조심스레 만져보려 했다. 선생님의 중재로 반장인 나는 주인을 찾을 때까지 이틀만 집에서 맡아 기르기로 했다. 약속한 수요일이 되었지만 나는 금세 친해져 어리광을 피우는 곱슬이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아빠, 우리 그냥 곱슬이 키우면 안 될까?


그렇게 2년을 함께 보냈다. 털이 곱슬거린다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길 잃은 혹은 버려진 강아지는 한 가족이 되어 '곱슬이'란 이름을 얻고 새롭게 태어났다. 슬픈 마지막은 사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저 키워도 된다는 아빠의 허락에 동생과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를 꽉 안아준 것만 생생하다.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털의 감촉, 새로 샴푸를 해서인지 은은하게 풍기는 향긋한 비누향, 공원을 마음껏 뛰고 오면 허겁지겁 물을 낼름낼름 할짝이는 곱슬이. 11년간 좌충우돌, 우여곡절을 겪은 철학자와 늑대에 비하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심을 다했다. 제일 반대하던 아빠는 세심하게 목욕을 시켜주고, 앉아! 손!을 가르치며 즐거워했다. 엄마 역시 털이 너무 날린다고 하면서도 이름을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강아지를 귀여워했다. 가족이 된 곱슬이는 떠났지만 소중한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photo-1504208434309-cb69f4fe52b0.jpg 개도 여행할 권리가 있다. (출처 : Jf Brou / Unsplash)


책의 마지막은 슬픈 감정이 용솟음쳤다. 서서히 이별을 예감하고 기력이 다해 가는 브레닌을 바라보는 작가의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을 원망하고, 술에 취해보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쉬울 수가 없다. 수많은 추억이 아직 아른거리는데, 눈앞에 항상 있던 이가 없다면? 허전함과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하기 힘들다. 철학 연구 내내 동물권, 체화된 인지론을 펼친 철학 교수. 남겨진 늑대개 니나와 테스를 돌보는 사내. 술독에 빠져 흥청망청 놀기만 했던 악동. 11년 인생 전체에서 '브레닌'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한 롤랜즈는 아마 더 아프고 힘들었을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보다 더 애절하고, 가족과의 멀어짐보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물론, 브레닌은 이미 가족이므로 이 표현은 틀린 말이다.)


나의 늑대 형제여. 우리, 꿈에서 다시 만나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의 찢어지는 가슴만큼이나 슬픈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마크 롤랜즈가 지난 추억을 곱씹으며 여생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철학 개론서, 혹은 동물권에 관련된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인 책이 아니라 늑대개와 함께 한 뜨거운 연애 소설을 본 느낌이다. 나도 오늘 자기 전엔 '곱슬이'를 떠올리며 웃으며 잠들 수 있겠다. 끝나지 않는 공원길을 지칠 때까지 같이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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