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삼년차 직장인, 오월
이렇게 다닐 수도 없고, 이렇게 관둘 수도 없을 때, 삼년차는 온다.
동생이 제주도 여행에서 내 생각이 나서 사온 선물이었다. 텀블러에 하나하나 올린 일기 같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모은 개인출판물인데 어영부영 어느덧 3년차를 맞이한 내게 딱이었다. '월급, 사표, 직장사람, 출근, 다중인격, 퇴근길' 그래프는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공감되었고, 다른 회사라고 별반 다르지 않구나를 새삼 느꼈다. 빈자리 '00' 표시에 좌절하는 지옥같은 출퇴근길도, 알콜 냄새와 고기 냄새가 뒤섞여 땀에 쩔은 가디건도, 10분이라도 피로를 풀기 위해 쪽잠을 청하는 지하 화장실 빈칸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로 횡설수설하는 상사도. 결국에 내 인생 8할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회사다. 연애/결혼/육아 고민의 원인이자 결과물인 직장인의 애환. 친한 선배 혹은 동기와 도란도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의 책이었다. 짧은 글과 그 찰나의 순간을 담은 사진은 웃픈 직장인의 정서를 관통했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걱정한만큼도 아닙니다.
항상 회사생활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선후배들의 질문에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기대한 것만큼 가치있거나 성취감이 느껴지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무지 못해먹겠다고 때려칠 정도의 업무 강도나 스트레스는 아니다. 미주알고주알 커피 한잔 마시면서 친한 선배에게 (뒷담화라고 하기엔 욕설이 담기지 않았으니..) 푸념을 하다 보면 재충전이 된다. 물론 맘 맞는 사람과 맛있는 식사는 +@요. 회사 업무 자체에서 엄청난 목표가 있는 편은 아니고, 일하며 희열을 느끼는 워커홀릭 타입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그저 위기 상황시 면피용에 특화된 성격이지만 때때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짬짬이 딴짓거리도 하면서도,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터지면 최대한 빠르게 물어보고 눈치껏 행동하는 편이다. 새삼 인복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친절하게 혹은 시크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는 선배도,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며 싹싹하게 일거리를 나누는 후배도. 심지어 저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좋은 롤모델이 되어준 인간도. 주변에는 항상 내게 어떻게든 영양분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이 빨간버스 때문이다. 교통의 발달 때문이다. 광역버스는 고속도로나 버스 중앙차선으로 쌩쌩 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퇴근시간에 꼬박 두세시간을 쏟아야 한다. 퇴근길 일산가는 빨간버스를 타기 위해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선 수백미터의 줄을 보면 기술의 발달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든다. 탈 것이 없었던 원시 시대에는 평균 시속이 4.5km였는데도 하루 이동시간이 깨어있는 시간 중 5퍼센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깨어있는 시간 중 22퍼센트 이상을 이동하는데 써버린다.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집 앞 텃밭에서 복숭아나무를 기르기 위해 오가는 시간 5퍼센트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짐나 난 21세기에 태어나 사대문 안까지 매일 출퇴근하기 위해 깨어있는 시간의 22퍼센트를 길 위에서 보내고 있다."
- 빨간버스 中
아.... 그건 신입 사원 때부터 그래가지고요... ㅋㅋㅋㅋㅋ
한 부서에만 계속 있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냐는 질문도 최근에는 많이 받는다. 다른 부서로 가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긴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단 생각도 든다. (자소서에 현란하게 적어둔) 꿈이나 포부가 워낙 거창하지 않고 소시민적인 나에게는 사실 업무 자체가 재밌던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들의 일거리를 도우면, 나도 뭔가 보탬이 되고 힘들 때 든든한 후배 몫을 한다는 사실에 뿌듯할 뿐이었다. 고된 야근이나 짜증나는 잡일도 그저 손에 익으니 조금은 편해졌고, 깨지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치유력이 3년차가 되니 늘어난 기분이다. 아침 잠이 항상 부족했지만 셔틀 버스의 존재로 훨씬 편해졌고, 야근이나 회식의 비중도 신입사원 때에 비해 많이 버틸만 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타성에 젖어 안주하려는 마음가짐을 고쳐야겠다고 느꼈다.
"직장인이 학생과 가장 큰 차이는 물론 '돈'이겠지만, 그로인해 학생은 통제력이 있는데 반해 직장인은 통제력이 없다. 학생은 땡땡이도 치고 휴학도 하고 일 년 계획도 착착 세울 수 있지만 직장인은 그런 게 부질없다. 계획을 세운들 인사발령나면 끝이니 허망하다. 상사부터 막내직원까지 도무지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되는 일이 없으니 헛헛하다. 그럴 때 운동은 정말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 안다. 어떻게 슬픔이 근육으로 변할 수 있는지. 직장인들이 왜 그리 피곤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헬스장으로 향하는지."
- 헬스장 中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인정을 받는 건 내 능력이 뛰어나서가 절대(!) 아니란 생각이 종종 든다. 그저 더 오래 했을 뿐이기에 남들보다 빠르게, 혹은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이건 상대적 능력의 차이가 아닌 절대적 경험의 차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영역이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특화된 능력이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높은 몇몇 직업군이 왜 자기 소리를 더 강하게 낼 수 있고, 자율성이 높은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저 여기에 안주하고 눈 앞에 일만 처리하다가 월급을 받아간다면 나도 서서히 꼰대가 되어갈 뿐이다. 10년, 20년이 흐른 뒤 (내가 여전히 목걸이를 걸고 이 직장에 다닐진 모르지만) 내 경쟁력이 고작 '아첨, 눈치, 주량'이면 너무 처량하지 않겠는가. 뭔가 대단한 결과물을 내놓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필요없다. 언제나 내게 직장이란 내 행복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적인 것이니. 차근차근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며 내게 주어진 '해야만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지금의 페이스가 중요하다. 1년차엔 나름 관심 분야에서 책을 펴냈고, 2년차엔 바쁜 시간을 쪼개 스페인, 대만, 일본 등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3년차엔 얼마나 더 가슴 떨리는 변화가 있을지 기대된다.
최선을 다해 살되, 결과에 초연하라.
(Work wholly heartly, but detach from it.)
책 말미에 씌어진 말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되,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즐겁게 살아보자.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눈앞의 확실한 행복을 애써 외면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20대 후반, 직장에서 썩어가고 쩔어간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소소한 행복을 찾아 나서며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자. 아, 그렇다고 매주 사는 직장인의 꿈 '로또'란 신을 믿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신이시여, 5등도 안되는 건 분명 큰 뜻이 있으리라 믿고 있사옵니다. 부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들어주시옵소서. 비나이다.
"그러니까. 모든 직장인들에게는 비밀이 있어야한다. 회사에서 하루 8시간 일을 한다 치면 퇴근 후 많으면 5시간 내외로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줌라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는 전표를 끊고, 기안을 올리고, 어르신들 컴퓨터도 고쳐주고, 고객들의 말도 안 되는 민원도 꾹 참아내고, 그렇게 평범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주말이면 여기저기 모여, 소설도 쓰고, 연극도 하고, 팔뚝질도 한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갑자기 비범한 그들만의 능력을 지니는 개인으로 변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난 한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 정은궐씨 中
- 후속작으로 <다시 신입사원>이 출간됐다니! <삼년차 직장인> 출판 이후 퇴사-재취업의 과정을 엮은 글이라니 꼭 읽어봐야겠다.
- 3년전 이야기를 다시 보니 신기하게도 그때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정확히 3년차 직장인 x 2 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나름대로의 목표를 차근차근 이루고 있을까? 확신은 없다 여전히.
- 위에 사진은 UNSPLASH / Ryoji Iwata 사진이다. 저런 비지니스맨을 꿈꿨는데 요즘은 청바지 입고 꾸역꾸역 출근한다.
-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한 동생도 어느덧 삼년차겠구나. 어디서나 힘내고 당당하게 지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