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랑 같이 살아보니 알겠더라
노동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기술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세탁기가 나왔을 때 "집안일 안 해도 돼!" 했고, 컴퓨터가 나왔을 때 "모든 게 자동화돼!" 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 사람에게 우리 하루를 설명한다면 어떨까.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일해요. 매일 왕복 50km를 출퇴근하고, 편지를 20통 보내고, 보고서를 산더미같이 쓰고, 온갖 책을 읽고, 전 세계 언어를 하고, 집에 와서 빨래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투표로 국가 의사결정에도 참여합니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이건 노비이자 마차꾼이자 전령이자 서기관이자 선비이자 역관이자 아낙이자 왕이다.
완전한 갓생 n잡러.
조선시대 사람이 몇 달에 걸쳐서 할 일을 현대인은 하루에 해치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노비+마차꾼+전령+선비"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자동차, 이메일, 컴퓨터, 번역기 같은 기술이 옛날 직업들을 통째로 흡수해버렸으니까.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인프라가 됐다.
AI도 똑같다.
코딩, 글쓰기, 디자인, 데이터 분석 — 지금은 "전문 스킬"이지만, AI라는 인프라에 흡수되면 "개발자", "작가", "디자이너"라는 분류도 "마차꾼", "전령"처럼 의미가 없어진다.
지금 마차꾼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 전령만 해서도, 역관만 해서도 안 된다. 조선시대 직업 하나에 해당하는 일만 해서는 현대 사회에서 먹고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AI 시대에는 현재의 직업 하나에 해당하는 일만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진다.
코딩만 하는 개발자, 글만 쓰는 작가, 소송만 하는 변호사 — AI가 그 스킬을 인프라로 만들어버리면, 그 스킬 하나에 기대어 사는 것은 마차꾼이 자동차 시대에 마차만 몰겠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컴퓨터가 보편화됐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자. 컴퓨터가 대체한 직업은 화이트칼라가 됐다. 컴퓨터가 대체하지 못한 직업은 블루칼라로 남았다. A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AI와 함께하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 되고, AI가 대체하지 못해서 사람 인력으로 해야 하는 직업은 안 좋은 직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뭐가 남을까?
나는 지금 회사 두 개의 대표이면서, 대학교 겸임교수이면서, 연구원 팀장이면서, 작가이면서, 국가위원회 강연자이면서, 정치인 IT 정책 자문이면서, 개발자다.
하루가 이렇다.
아침에 서울시장 후보를 위한 IT 정책 보고서를 쓴다. 점심 전에 발표 슬라이드 50장을 만든다. 오후에는 웹사이트를 개발하고, 저녁에는 대학원 수업을 위한 교재를 쓴다. 주말에는 AI 치트시트를 디자인한다.
이 모든 걸 Claude Code라는 AI 코딩 도구 하나로 직접 만든다.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관성이 있다.
한국 보안 시스템을 글로벌 표준으로 바꾸는 것.
상담사들이 AI를 활용하게 돕는 것.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
전부 "전환"이다.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일.
내 직업은 CEO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개발자도 아니다.
전환 기획자(Transition Planner)다.
여러 개의 스킬을 가진 n잡러가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가진 사람.
이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AI와 함께 일하면서 코딩도 하고, 글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강의도 만들다 보니 — 스킬의 경계가 사라지니까 비로소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선명해졌다.
변호사를 생각해보자.
옛날 변호사는 소송하고 계약서 쓰는 사람이었다. AI 시대의 변호사는? 소송도 하지만, 이주민 노동자를 위한 권리 교육 유튜브도 운영하고, AI로 영상 자막을 6개 언어로 번역하고, 피해자 상담 예약 앱도 직접 만든다.
"변호사"보다 "약자 보호자"가 더 정확한 이름이다.
작가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 작가는 글만 썼다. 지금은 같은 생각을 책으로도 쓰고, 유튜브로도 만들고, 팟캐스트로도 말하고, 뉴스레터로도 보내고, 숏폼으로도 퍼뜨린다.
"작가"보다 "생각 전달자"가 더 정확하다.
개발자는 더 극적이다. 코딩 자체는 AI가 대부분 해준다. 남는 건 "세상의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를 고르는 것.
"개발자"보다 "문제 해결자"가 더 정확하다.
개발자 → 문제 해결자
코딩, 디자인, 설계, 런칭, 프로덕트 관리를 한 사람이 한다.
작가 → 생각 전달자
책, 유튜브, 팟캐스트, 뉴스레터, 숏폼을 한 사람이 만든다.
변호사 → 약자 보호자
소송, 피해자 앱, 권리 교육 영상, 정책 보고서를 한 사람이 만든다.
의사 → 생명 지킴이
진료, 환자 모니터링 앱, 건강 교육 콘텐츠, 원격 진료 플랫폼을 한 사람이 운영한다.
교수 → 성장 안내자
강의, AI 튜터 챗봇, 학습 앱, 교재, 팟캐스트를 한 사람이 만든다.
상담사 → 마음 치유자
상담, AI 챗봇, 감정일기 앱, 명상 음악, 심리 교육 콘텐츠를 한 사람이 만든다.
디자이너 → 경험 창조자
웹사이트, 브랜딩, 공간, 제품, 영상을 한 사람이 설계한다.
음악가 → 감정 설계자
작곡, 뮤직비디오, 공연 연출, 팬 커뮤니티, 음악 교육을 한 사람이 한다.
기자 → 진실 추적자
기사, 탐사 다큐, 데이터 시각화, 팩트체크 플랫폼을 한 사람이 운영한다.
사업가 → 생태계 창조자
플랫폼, 커뮤니티, 교육, 미디어, 투자를 한 사람이 세운다.
스킬의 벽이 사라지면, 남는 건 "왜"뿐이다.
옛날에는 전기를 쓰려면 발전기를 직접 돌려야 했다. 지금은 콘센트에 꽂으면 된다. 전기가 사라진 게 아니라 인프라가 된 것이다.
코딩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앱을 만들려면 개발자를 고용해야 했다. 지금은 AI에게 말하면 된다. 코딩이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구나 쓸 수 있는 인프라가 된 것이다.
사람에게 남는 것은 "왜"다.
왜 이 앱을 만드는가.
왜 이 글을 쓰는가.
왜 이 사람을 돕는가.
그 "왜"가 곧 직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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