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맨땅에 헤딩했던 1세대 한국인 창업가들의 이야기
실리콘밸리는 미래를 엄청난 속도로 바꾸어가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자율주행차를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게 할 것이며, 블록체인은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주식회사 체제에서 벗어나 아직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우리의 건강과 수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문득 우리가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돌아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실리콘밸리의 한국인들의 역사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실리콘밸리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갔을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던 1980년대 실리콘밸리의 한국인들. 지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활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놀라웠다.
실리콘밸리의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던 세 명의 한국인들, 그리고 그들의 창업가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1970년대 거의 빈손이었던 필립 황은 직업도 없는 실업자였다. 1970년대 이민자에게 사업을 시작할 자금을 제공할만한 투자자는 아무도 없었다. 필립 황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호소하여 9천 달러의 사업 자금을 어렵게 어렵게 모았다. 아무도 그의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 자본금의 98%가 필립 황 개인의 자본이었다. 필립 황을 오랫동안 알고 지낸 변호사이자 목사였던 폴 킴은 그 당시 여기저기 자본금을 모으러 다니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1975년 필립 황은 텔레비디오(TeleVideo)를 창업하였다.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의 많은 도움으로, 그리고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회사를 조금씩 키워나가기 시작하였다. 70년대-8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인건비가 미국에 비해 훨씬 저렴하여 미국에 비해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 이점을 활용하여 황규빈은 한국에서 제조한 하드웨어를 미국에 판매하였다. 1970년대에는 게임용 모니터를 주로 판매하였으며, 1980년대부터는 PC 시장에 본격 진출하였다.
창업한 지 8년이 된 1983년도에는 나스닥에 상장했다. 당시 한국계 기업으로는 최초의 일이었다. 필립 황은 포브스(Forbes) 부호 명단에 올라, 당시 이미 부호였던 스티브 잡스보다 세 배나 많은 자산(6억 달러, 약 7천억 원)을 기록하였다.
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는 텔레비디오 컴퓨터에 MS-DOS를 탑재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텔레비디오의 오피스 로비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필립 황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결과 1983년 4월에 MS-DOS 2.0을 탑재한 XT 컴퓨터를 시장에 내놓았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필립 황의 조카, 마이클 양은 2001년 인터넷 쇼핑 가격 비교 사이트인 마이 사이먼 닷컴으로 또 하나의 한국계 기업가의 실리콘 밸리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그의 회사는 7억 달러 (~8,200억 원)에 매각되었다.
회사 가치가 한때 20억 달러까지 치솟으면서 황 회장의 주식 자산도 1조 원이 넘는 12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참고로 20년 뒤 2003년도에 유튜브 열광이 치솟기 시작했을 때에,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가격은 16억 5천 달러 ($1.6Bn)이다.) 요즘의 스타트업과 달리 98%에 달하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회사의 성공은 필립 황의 부로 직결되었다.
이후 시장이 윈도 체제로 넘어가면서 절대 강자로 떠오른 IBM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또한 한국 공장의 노동파업으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Neoware라는 회사에, 2007년에는 HP에 팔린 끝에 2011년 공식적으로 판매를 마감하였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 왼쪽부터, Storm Ventures의 남태희, Booga Ventures의 Young Song, MySimon.com의 Michael Yang, Angel Investor 및 실리콘 밸리 베테랑 Paul Kim, Color Genomics의 Christine Moon(저자), Ignite XL의 Claire Chang, Tapas Media의 김창원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않았던 필립 황의 TeleVideo는 그렇게 실리콘밸리의 중요한 하드웨어 제조/판매 업체로 한 시대를 장식했다.
“기업가가 하는 일의 5%만이 큰 그림을 그리고 멋있게 전략 회의를 하는 것 등이다. 나머지 95%는 어떻게 보면 손에 흙을 묻혀야 하는 그런 덜 멋있는 작업들이다.”
에릭 리스의 “린 스타트업(The Lean Start-Up)
스티브 강은 17세의 나이에 단돈 200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한 ‘1세대’로 미시간 공대 전기공학 학·석사를 졸업한 후 7년 동안 IBM에 근무했다. IBM은 그 당시에도,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정적이고 높은 연봉을 주는 좋은 회사이다. 그 회사에 수십 년을 더 근무했으면 더 편하게 살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의 목표는 안정적인 삶이 아니었다. 포브스에 실린 나의 옛 동료의 글 “Why I Left Google For a Job That Paid Less”을 읽어보면 왜 실리콘밸리에서 사람들이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의 고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떠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전 글, 나는 회사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Am I doing my best work here?(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즉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행복에 직결되어 있다. 스티브 강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창업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IBM에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IBM이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스티브 강은 IBM을 떠나 Leading Edge사를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우가 제조를 맡아 1985년 Leading Edge Model D라는 모델을 내놓았고 미국 시장에서 가격 대비 최고 성능의 컴퓨터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1993년에는 애플 호환 기종을 판매하는 파워 컴퓨팅사를 설립하였다. 지금은 애플이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에 MacOS를 설치해서 구동하는 호환기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의 애플에게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삼성폰에 iOS를 설치해서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1980년대의 애플은 APPLE II 시리즈까지 호환기종을 허락했었다.
스티브 강의 파워 컴퓨팅은 애플사의 매킨토시 컴퓨터의 호환기종 첫 생산 판매업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5월부터 ‘파워 80(Power 80)’이란 명칭으로 매킨토시 클론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그 해 연말 5만 대의 클론을 팔았고, 매출액이 1억 달러에 달했다.
그렇지만 곧 애플은 라이센싱 프로그램을 마감하기로 결정한다. 맥 클론, 즉 파워 컴퓨팅 성공적인 판매가 애플에게는 저가의 맥 OS 기종을 보급/확대하려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수익 잠식으로만 인식되어 애플이 맥 클론들의 성장을 곱게 보지 않았다.
애플이 라이센싱 프로그램을 마감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1999년 파워 컴퓨팅의 인수를 제안하였다. 스티브 강은 이를 받아들여 1억 달러($110MM)에 해당하는 애플 주식에 매각하였다. 그 금액은 약 30년 동안 공개된 인수 가격들 중 2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애플 주가는 그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실리콘밸리 창업이 엔지니어링 백그라운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데이팅 앱인 커피 미츠 베이글(Coffee Meets Bagel) 한국인 세 자매 창업자들이 테크니컬 코파운더 없이 창업한 이야기나 또한 두 명의 디자이너 친구들이 시작한 에어비앤비 (AirBnB) 이야기는 창업에 도전하려는 비공대생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다.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아 (Diamond Multimedia Systems)의 이종문(Chong Moon Lee) 역시 공대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종근당 창업주인 이종근의 막냇동생이며, 당시 종근당의 상무로 있으면서 진통해열제로 유명한 사리돈 생산을 비롯해 항생제 생산 공장을 만들어 수출까지 했다. 이종문은 47세 때인 1975년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 당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실리콘밸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54세였던 1982년, 이종문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설립하였다.
그는 엔지니어링 백그라운드가 전혀 없는 사업가였다. 처음 접한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은 이전의 그의 경험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에 6개월로 잡았던 상품 개발 기간은 6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6년간 수입이 없는 생활이 이어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생활비가 부족하여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하였으며, 세금은 밀리고, 아내와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때에 그가 택한 것은 될 때까지 무모하게 도전하는 허슬링(Hustling)이었다.
앞문이 닫혀 있다면 뒷문을 찾아보며 원하는 목적지에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허슬링이다. 사업을 위해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를 만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였다. 다이몬드 멀티미디아는 창업 후 8년 동안의 긴 처절한 나날들이 있은 후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급신장을 기록하며 1995년 나스닥에 상장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에 위치한 유명한 아시아 박물관(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의 공식적인 이름은 “이종문 아시아예술문화센터(Chong-moon Lee Center for Asian Art & Cultural Center)”이다. 오랜 고생 끝에 성공한 그는 1995년 1천6백만 달러 (약 180억 원)을 아시아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고려대학교에도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기증하였다.
이전 글, “망치로는 와인병을 열 수 없다"에서 실리콘 밸리의 원동력인 다양성에 대해서 얘기해 보았다. 1980년대 활약했던 한국계 1세대 창업자들은 실리콘 밸리에 다양성의 힘을 제공하며 세계 기술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미국 싱크탱크인 ITIF(Information Technology & Innovation Foundation)가 발표한 내용에서 미국 혁신에 이바지하는 것 중에 주요소는 이민자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특히 아시아인들 (인도, 중국, 동아시아)을 합하면 이민자 이노베이터의 43.7%로 1위를 차지한다.
또한 이노베이터들의 평균 연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후디를 입은 20대만이 아닌 약간 흰머리도 있고 주름이 있을 법한 47세이다.
스타트업의 성공요소는 창업 아이디어, 투자 자본, 젊음만이 아니다. 어려움과 맞설 수 있는 굴하지 않는 용기(grit), 때로는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회사 생활을 박차고 나와 좀 더 위태로울 수 있는 꿈을 좇는 도전 정신(daring to dream, audacity), 그리고 열정적으로 아등바등거리며 노력하는 허슬(hustle)이 성공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임을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 성공 신화를 이룬 1980년대 한국계 창업선배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nevertoolate #grit #audacity #hustle
글: Christine.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십 담당. 모바일, 클라우드 서비스에 많은 경험. 조직의 다양성, 성장형 마인드셋, 여성 CEO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음.
그림: Chili. 디자이너. 생각을 그림으로 요약하는데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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