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인생

방황과 성장

by 피트니스 큐레이터


방황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엔 중학교로 올라 갈 때는 시험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누구나 진학을 할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는 고등학교 진학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제부터는 정부가 계획한 의무 교육은 끝이 나고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은 일치감치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도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 진 것이다. 나는 중학교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 시험을 간신히 턱걸이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세상의 기준을 통과 한 사건이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대학원 시험까지 줄곧 커트라인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나는 신체적으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키가 130센티미터였던 것이 140센티미터가 되었고 몸무게도 40킬로그램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50명가량 되는 반 아이들 중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리고 그때당시에는 심각하게 고민 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겨드랑이와 가랑이에 털이 수북하게 자랐는데 나는 아직도 솜털이어서 보이는 둥 마는 둥 했다. 한마디로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늦은 편인 것이다. 그래서 늘 고등학교 다닐 땐 키와 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는 다행히도 중학교 때 다녔던 학교 그대로 배정 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친구들 중 몇몇은 다소 먼 곳으로 배정 받아서 미안한 마음에 좋아하는 내색도 못 냈다.

이렇게 고등학교는 만인에 대해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어서 같은 학년일 찌라도 1년 재수해서 들어온 형들이 반에서 한 명 내지 두 명 정도가 섞여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형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못했다. 그리고 모든 먹이사슬에서 당당히 육식동물 서열에 올라 있어서 생태계에 큰 혼선을 빚곤 하였다. 그리고 싸움 짱도 현역이 아닌 한 살 많은 재수생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교련이라는 수업을 받았다.(내 기억으로는) 교련 선생님들은 육군 예비역 출신이었다. 그중 한 선생님은 일사 후퇴 때 공수부대 장교 출신이다.

나는 교련 시간이 너무도 싫었다. 매번 교련복으로 신속하게 갈아입어야 하고 바클과 고무링을 차야 하는데 매번 행동이 늦어서 얼차려를 받곤 하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주판으로 머리를 대패질 하듯이 빡빡 문지른 일이다. 그 당시에 어찌나 아팠던지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지금은 만에 하나 그런 행동을 할라치면 몰카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려서 담당 선생뿐 아니라 학교 교장까지 구설수에 휘말리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벌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좋아하는 과목이 체육 외엔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나마 체육시간에도 정규 수업을 하지 않고 자습으로 돌렸으니 고등학교시절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다. 반에서 30등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 웬만한 4년제 대학에 입학하려면 반에서 10등 안에 들어야 했고 2년제 전문대는 15등 안에는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학교 수업은 재미가 없어서 학교에서 포기한 무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지금은 당구장의 이미지가 많이 좋아 졌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만해도 그곳은 비행의 온산지가 되었다. 나는 고2때 처음 당구장을 갔다. 그런데 방과 후에 가면 되는데 꼭 5교시와 6교시를 땡땡이를 치고 담을 넘는 것을 관행으로 알았다. 그렇게 2시간가량을 한사람에게 덤탱이 씌우기 당구 게임을 하고난 뒤 종례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배어나오는 담배연기는 온 교실을 뒤덮었다.


담배는 고2때 피웠다.


피우게 된 동기는 내가 좋아하는 교회 형이 고3이 되어 진로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피워서 나도 같이 따라 피우게 되었다. 처음에 연속으로 한라산 담배 3개비를 피우고 구토와 두통을 호소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후론 아무리 많이 피워도 어지럽거나 구토증상은 없었다. 뭐든지 처음 배우는 것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건가 보다.

담배에 대한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 7시20분까지 등교를 하고 곧바로 화장실에 가서 담배 하나를 꼬나물었다. 그 당시 홍콩 영화가 유행 이었는데 나는 유덕화의 담배피우는 모습이 멋있어서 늘 네 손가락을 위에 올리고 엄지는 아래에다 대고 피웠다. 깊게 한 모금 쭉 빨아서 목구멍에 잠시 머물게 하고선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어 댔다. 정말 그 순간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기분이 묘하고 황홀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시야에 감지가 되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뜨악! 킬러였다. 참고로 킬러는 체육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학생주임이다. 별명답게 그는 이른 아침에 기습한 것이다. 마치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표적 단속하는 경찰처럼 (안전벨트 미착용 운전자를 잡기 위해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스윽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경광등을 흔들어 차를 세운다) 말이다.

나는 온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순순히 학생 주임의 지시에 따라 담배와 라이터를 내놓고 손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햄스트링을 무차별 공격당한 후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학생주임은

“오늘은 교실에서 수업 하지 말고 6교시 내내 화장실을 지킨다. 교실 가서 책상과 걸상을 가져와”라고 호통 치며 명령한다.

그날 난 정말 찌린 내 나고 똥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장작 6시간을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킬러에게 하달 받은 한 가지 미션은 내부 고발 자가 되라는 지시였다. 담배 피우는 애들 명단을 리스트 해 오란 소리였다. 한사람도 안 쓰면 내일도 화장실에서 수업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담배 동지들을 배반했다. 그 당시 의리라는 것이 정립이 되지 않았던 나이라 고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화장실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수업 끝나고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6시간 동안 숙성된 지린내와 똥내가 방안에 퍼지고 끝내는 엄마의 콧구멍으로 스며들어갔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 똥 푸나”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담배와 당구장 그리고 도박에 빠져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겐 이렇다 할 꿈이 없었던 것 같다.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 말이다. 태권도 사범이 되고자 했던 꿈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는 더욱 방황의 골은 깊어만 갔다.

학교에서는 반에서 15등 안에 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깐 수업에 방해만 주지 말도록 하라고 대놓고 말씀 하신다. 그래도 반에서 3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은 적어도 전문대라도 갈 목적으로 가랑이를 벌리며 황새를 따라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고3이 되어서는 30등 안에도 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공부가 하기 싫었다. 공부를 한 과목은 그래도 성적이 좋게 나왔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과목은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다. 그리고 형편없는 점수가 나온 과목이 더 많았다.




나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면 어김없이 독서실을 끊어서 공부하러 다녔다. 그러나 그 곳엔 약속이라도 한 듯 담배피우고 당구치고 도박하는 아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정말 맹자의 어머니가 왜 아들의 공부를 위해 삼천 번을 이사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독서실에서 모인 우리는 재밌는 일을 도모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계획을 내놓는다. 그런데 다소 위험한 일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한명씩 돌아가면서 여자 열람실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여자 아이의 가슴을 만지고 나오는 거야, 어때?”

완전 기상천외하고 스릴 있고 위험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담력을 키운다는 미명아래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한명씩 들어가서 거사를 치르고 나왔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선 그들과의 화합과 룰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여자 열람실에 들어갔다. 안은 깜깜했다. 그러나 잠시

후 1미터 정도의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책상에서 자고 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고 있는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가슴을 만지려고 허공을 향해 더듬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자고 있던 그 여자는 눈을 뜨더니 내 눈과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도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감지 한 듯 뿔뿔이 흩어졌다. 아마도 그 여자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어두웠고 나는 황급히 달아났기에 분명히 못 봤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여자 열람실은 밤 12시가 되면 모두 퇴실했고 독서실 대문도 모두 잠가 버렸다. 그래서 남자들만 밤을 셀 수 있었고 항상 독서실 총무가 감시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게 되었다. 다음날 시험은 당연히 죽 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먼저 들어간 애들은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는 장황하게 상황 묘사를 손짓 발짓을 하면서 재연 하였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고등학교 아이들은 여자에 얽힌 개인만의 무용담을 침 튀겨 가면서 열변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지금 고등학생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여자 친구와 잔 얘기하며 몰래 영상물을 본 내용들이 주로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그러하기에 이번에 시도하려 했던 독서실 사건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대학 학력고사를 치루는 날이 왔다. 1974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번 학력고사가 마지막이었다. 그 당시는 1993년도였다. 그러니깐 1994년도에는 수능고사가 처음 시작되었다.

시험을 보러가는 나는 덤덤했다. 왜냐하면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너무도 한심해 보였다. 나는 일치감치 아는 문제는 풀고 모르는 문제는 연필을 굴리고 혹여 주관식이면 비워두고 수학은 ‘0’아니면 ‘1’로 일필지휘로 써내려갔다.


성장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말로 고3 시절은 일생동안 중요한 시기 였다. 그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26살 늦깎이로 대학생이 되었으니깐 무려 7년을 돌아온 셈이었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빈둥빈둥 엄마 돈이나 축내는 망나니로 전락했던 이유는 누구처럼 살고자 하는 모델링과 무엇이 되었으면 하는 꿈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 내가 이지성 작가가 쓴 ‘꿈꾸는 다락방’의 'R= VD'라는 공식을 접했더라면 현재의 내 모습을 조금 더 앞당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R (realization) = V (vivid) × D (dream)}


여기서 'R= VD'의 공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시각화(visualization)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를 생생하게 꿈꿔야 한다. 마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세세하고 생동감 있게 말이다.

꿈꾸는 다락방은 'R= VD '만 알면 돤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공식(R= VD)을 실천했다. 7막7장의 저자인 홍정욱 코리아 헤럴드 사장도은 미국 대통령인 존F 케네디를 닮고자 중학생인 나이에 홀로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끝내는 존F 케네디가 나온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존F 케네디라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목표를 그리고 그것을 꿈꿔 왔기에 하버드 대학을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학력고사에 떨어지고 답 없는 재수 생활을 위해 종합 반을 알아봤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는 날에는 집에서 늦잠을 자면서 일부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떨어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들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따로 졸업장과 개근상을 받으러 학교에 찾아갔다.


고등학교 때도 난 다른 건 몰라도 출석엔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