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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트니스 큐레이터 Nov 27. 2015

make a difference

인생의 전환점


다짐


삼수를 하면서도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나는 이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처럼 입영 통지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통지서를 받을 때 까지 집에서 빈둥대느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 당구장이었다. 재수 때 한참 빠져서 쳤던 당구를 이젠 아르바이트로 컴백하다니 인생 참 얄궂다는 생각을 했다. 당구장에서 해야 할 일을 이미 재수 생활 때 견 눈질로 보아 왔기 때문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군대 가기 전 까지 다양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중 인상에 남았던 일은 주유소와 건설 일용직(노가다) 그리고 ‘아트 박스’ 하청 업체에서 부속품 만들기 등이다. 다행히 사회생활을 조금이나마 겪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입영 통지서가 9월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 시험이 끝나고 9월까지 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라도 해야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삼수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 금을 마련해 주신 것을 갚는 것이 효라 생각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을 아까워한다. 한 창 생산적인 일을 할 나이에 허송세월을 보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보낸 군 생활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삼수까지 했지만 대학을 가지 못했기에 스스로 인생 낙오자라라고 치부하고 하루하루를 피해 의식 속에 살아왔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피했고 단지 종교 생활에 전념했다. 교회는 힘든 나를 위로해 주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군대 입대를 40일 남겨두고 나는 40일 새벽예배를 한 번도 빠짐없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교회로 기도하러 다녔다.

그 당시 기도 내용은 대략 이런 거였다.

군대 가서 정신 차려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인생의 전환점, 군대


그렇게 정해진 시간들이 흐르고 나는 시한부 인생의 최후를 맞는 냥 숙연하게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서서 논산 훈련소로 향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어 어머님께 건네주면서 “군대 가서 담배 끊고 오겠습니다. 막내아들 사람 돼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나는 뒤돌아서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하고 2년 2개월의 군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 신분으로 첫날밤을 맞이했다. 지급받은 속옷과 활동복을 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 이제야야 한숨 돌리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변해야 살 수 있다고.


훈련병 시절은 누구나 어리바리하고 멋을 내려고 해도 전혀 전투복의 핏(fit)이 살지 않는다. 적어도 상병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군대의 패션을 누릴 수 있다.

고된 훈련병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자대 배치를 받았다. 100여 명이나 되는 중대 인원 중에서 최고 낮은 이등병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나를 테스트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더 이상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시련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참 이라는 작자들의 행동은 참으로 저속하고 비열했다. 담배를 끊고 오겠다고 엄마에게 선포하고 들어왔는데 담배로 인해 웃지 못 할 해프닝이 터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니깐 ‘그럼 씹어 먹어’라는 황당한 요구를 해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가 여물 먹듯이 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독한 놈으로 소문났고 고참 들은 더 이상 담배를 권하지 않았다. 정면 승부의 승리다.  


그리고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그날은 유독 훈련이 힘들었다. 그런데 상병 서열 중 한 사람((당시 불침번 근무자로 생각된다)이 한밤중에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치면서 깨우더니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100여 명의 고참 이름을 들어온 순서(1995년 8월 군번부터)대로 모두 외우라고 윽박지르며 못 외우면 가차 없이 몽둥이찜질을 해댔다. 너무나 서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자칫 하다간 구타로 반병신 되어서 제대하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내가 겪은 군대 생활을 잘 표현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바로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이 영화는 2005년도에 만들어졌고 그 당시 주연으로 나왔던 배우가 ‘하정우’이다.


영화의 전개 구도는 3명의 캐릭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군기를 책임지는 병장인 태정(하정우)과 먹물 고문관 승영(서장원)이 그리고 관심사병인 지훈(윤종빈)이다. 이러한 3명의 등장인물은 실제 군대 안에 형성된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조금 더 부연 설명하자면, 영화에서 태정이는 전형적인 보수적 성향을 띤다. 일명 군 생활 요령껏 잘하는 병장이다. 중대의 질서를 위해서 폭력을 묵인하고 또한 구타를 자행하면서 지금껏 답습해온 문화를 거슬리지 않으며 무사히 제대하고자 한다. 또한 대학(연세대)을 다니다가 군대에 오게 된 승영이는 부조리한 군대의 문화를 개혁하고자 하는 혁명파적 성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매번 현실의 벽에 부딪쳐 고뇌하며 고참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러한 그에게 후임 병이 들어오는데 그가 관심사병인 지훈이다. 지훈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여리다. 또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어리버리한 인물이다.


세 명의 인물 중에서 나는 그래도 승영이와 비슷한 캐릭터였다. 내가 고참이 되면 구타를 모든 없앨 것이라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영화에서 지훈이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죽는 모습을 보고 도의적 책임을 갖게 된 승영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역시 요골 동맥을 끊어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군대 내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가혹행위와 구타를 당할 땐 내 안의 헐크를 깨우려고 몇 번이고 망설였다.

다행히도 힘든 시절을 잘 이겨내고 중대를 이끌어 나가야 할 서열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 후로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제대할 때쯤 되니깐 70여 권에 이르게 되었다.

군대에서의 삶은 단지 버텨야 만하는 곤욕스러운 나날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제대할 때쯤에는 행정보급관이 내게 직업 군인을 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제가 가야 할 길은 군인이 아닙니다.”라고......,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남자들이 군대 간 얘기고 더 싫어하는 대화는 군대 가서 축구한 얘기라 할 정도로 군대에서는 축구를 많이 한다. 그리고 일급 보안이지만, 군대에서 의과사로 제대하는 비율 중 축구가 절반을 차지한다. 이러한 군대 안에서의 축구 문화로 인해 나는 중대 고참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당시 축구는 좀 잘 찼다. 한 번은 중대장이 축구 때문에 작업장에 나가 일하고 있는 나를 부대로 복귀시켜서 중대 대항 축구 시합을 뛰게 했던 적이 있다.(그만큼 축구는 군대에서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필수사항 이였다)


그러던 중 중대장이 어느 날 나를 불러 한 말이 현재의 나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중대장은 내가 중대 체육대회나 체력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보고는 대학에 가서 체육을 더 공부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처음엔 그냥 한 말로 알았는데 그 이후에 몇 번 더 내게 권유를 해서 곰곰이 체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현재의 체육 전공을 한 운동처방사가 된 것이다.

군대를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습관적으로 피웠던 담배도 끊게 되었고 책도 열심히 읽었고 신앙을 돈독히 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루고 싶은 계획이 생겼다.


make a difference


군대는 나에게 실패를 딛고 새롭게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게 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대학을 다니고 또는 이루고자 하는 꿈을 향해 정진하다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다른 사람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단계를 차곡차곡 쌓는 시간으로 삼았다. 남들과는 다른 의미부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make a difference'로 표현 할 수 있다. 이 말은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얘기한 적이 있다. 즉 남들과 경쟁하려 하지 말고 단지 다름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처럼 군대는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 변화의 시작은  ‘다름’을 만들고자한 마인드였다. 그 당시 군대또한 대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그들과는 사뭇 다른 내 처지를 비관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군 시절 동안 내안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세운 목표에 가까워지려고 늘 노력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가고자 장수생의 길을 선택했을 때도 단지 다른 것뿐임을 늘 마음에 새겼다.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다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때의 ‘다름’은 세월이 지나고 현재의 직업정신에 있어서도 적용하고 있다.

내 밥벌이는 퍼스널 트레이닝이다. 비슷한 의미로는 ‘홈 트레이닝’이다. 그런데 집으로 직접 방문하여 운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센터에서 수업이 진행된다. 현재 PT(personal training)를 받고 있는 회원 수는 대략 30명 정도다. PT를 받고 있는 회원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회사 중역 간부들부터 시작해서 변호사 및 의사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사회적 위치만을 생각하고 트레이닝을 한다면 위축되어 제대로 된 수업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나만의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기에 그 높은 지위에 대해서 주눅 들지 않게 된다.


다름은 이처럼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역할을 맡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환경미화원이 자신을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는 일을 한다는 마인드가 바로 다름을 잘 표현한 것이다.

비교하지 말고 다름을 만드는 것이 잘난 것들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비교는 바보들의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첫 출판  간담회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http://naver.me/x18FVQ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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