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마하트마 선생님!
저기요. 마하트마 선생님
‘마하트마’ 하면 간디가 떠오르겠지요? 마하트마 간디는 저에겐 국민학생, 아, 아니 초등학생 때부터 유명했죠. 교과서에 동그란 안경 끼고 물레 돌리는 사진이 실려있었거든요. 과거 우리나라처럼 식민지의 아픔을 겪던 인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며, 해방 후 인도 내 반대 세력의 총격으로 서거한,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과 비슷한 길을 걸으셨던 분이라 왠지 정감이 갔었더랍니다. 그러고 보니 동그란 안경을 썼던 것도 비슷하네요.
한데 마하트마가 성이고 간디가 이름이거나, 반대로 마하트마가 이름이고 간디가 성인 줄 아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저도 그땐 그리 알고 있었더랍니다. 하지만 마하트마는 성도 아니고 이름도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 이름 앞에 성웅(聖雄)이라는 존칭을 붙이지요? 이와 비슷한 겁니다.
마하(mahā)는 ‘위대한’, ‘큰’을 뜻합니다. 아뜨마(ātma)는 ‘인간의 순수한 본질’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아뜨만(ātman)과 같은 말입니다. 이 둘이 합쳐져 마하 아뜨마(mahātma)가 되었지요. ‘위대한 영혼’ 정도로 번역하면 무난할 겁니다. 문자를 잘 보시면 마하의 ‘하’도 장모음이고 아뜨마의 ‘아’도 장모음이지요? 산스끄리뜨 연성 법칙(sandhi; 산디)에 따라 하나의 장음(ā)으로 표기합니다만, 이렇게요. ā+ā=ā. 실제 음가는 좀 더 길게 발음됩니다. 따라서 적어도 마하트마는 아닌 거지요.
그런데 간디는 왜 마하아뜨마가 되었을까요? 인도 독립의 주역이라서요? 맞습니다. 맞고요. 거기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간디가 주도했던 독립운동의 모토(moto)가 비폭력 무저항이었지요. 이것을 사띠야아그라하 안돌라나(satyāgraha āndolana)라고 합니다. 사띠야(satya)는 ‘진리’ 또는 ‘진실’을 뜻한답니다. ‘진실한’이라는 형용사로도 쓰이지요. 아그라하(āgraha)는 ‘강한 의지’를 뜻합니다. 그라하(graha)는 √gṛh(그리흐; 꽉 붙잡다)에서 왔습니다. 영어 grab과 같은 뜻입니다. 모양도 비슷하지요? grip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에 ‘가까이’를 뜻하는 접두어 ‘ā’가 더해져서 문자적으로는 ‘가까이 다가가서 꽉 붙잡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āgraha는 고집을 뜻하기도 합니다. āndolana는 운동(movement)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띠야아그라하 안돌라나는 ‘진리에 대한 강한 의지 운동’이 되겠지요? 우리에겐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잘 알려졌지요.
이 사띠야아그라하의 중심에는 모든 인도 종교의 첫 번째 계율인 아힝사(ahiṁsa)가 있습니다. √hiṁs(힝스; 헤치다)에서 왔지요. 폭력이나 살생을 뜻하는 hiṁsa에 부정(否定) 접두어 a를 더해 비폭력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오계(五戒)인 불살생의 원어이기도 합니다. 불살생보다는 비폭력이 더 범위가 넓으므로 비폭력이 더 좋은 번역이 아닐까 합니다. “난 죽이지는 않았어. 반쯤 죽였지!” 이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간디가 몸담았던 자이나교의 첫 번째 계율도 당연히 아힝사입니다. 자이나교는 아힝사의 원조지요. 자이나교는 고따마 붓다와 동시대 사람이자 연장자였던 와르다마나(vardhamāna)가 창시한 종교입니다. 그는 30세에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 마하위라(mahāvīra)가 되었지요. ‘위대한 영웅(vīra)’이라는 뜻입니다. 고따마 싯다르타가 이름보다 붓다로 불리는 것처럼, 와르다마나도 이름 대신 마하위라로 불립니다. 한역(漢譯)하면 대웅(大雄)이지요.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무조건 있습니다. 대웅전.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영웅을 모신 집’이란 뜻이지요. 절집의 대웅은 당연히 붓다입니다. 요가 자세 이름에도 위라(vīra)가 나오지요. 영웅좌라고 부르는 위라아사나(vīrāsana)와 전사 자세라고 흔히 부르는 위라바드라아사나(vīrābhadrāsana)가 있습니다. √vīr(힘세다)에서 나와 힘센 사람이 되었지요. 옛날엔 힘센 사람이 전쟁에서 전과를 올리고 영웅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이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비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vīra(위라)는 영웅으로 번역됩니다. 전사자도 위라(vīra)가 됩니다. 우리도 한국전쟁 전사자를 전쟁 영웅이라고 예우하지요. 그런데 수행자는 열심히 용맹정진해야겠지요? 정진(精進)의 원어인 vīrya(위랴)는 힘써 노력함을 뜻하는 말로, 역시 √vīr에서 왔습니다.
아힝사는 너무나 중요해서 요가수뜨라에도 나오고, 심지어 하타요가 경전인 하타쁘라디삐까에도 나오지요. 간디는 인도 종교의 핵심인 비폭력을 전면에 내세워 폭압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식민정책에 협조도 하지 않는다는 유례없는 독립운동을 이끌었기에, 우리에게 ‘동방의 등불’이란 시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타고르로부터 마하아뜨마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고 이후 간디를 수식하는 존칭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하아뜨마가 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요. 요가는 우리 안의 마하아뜨마를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요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아뜨마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것을 요가수뜨라에서는 아슈땅가(aṣṭāṅga)라고 합니다. 요가 좀 해보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아쉬탕가 요가라고 하지요. 출처를 이제 아셨겠지요? 하지만 브랜드처럼 되어버린 이 아쉬탕가 요가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아슈땅가는 8을 뜻하는 aṣṭa(아슈따)와 부분 또는 사지(四肢)를 뜻하는 aṅga(앙가)가 합쳐진 말입니다. 여덟 부분 또는 여덟 가지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학계에서는 팔지(八支) 요가라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슈땅가 요가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된 요가를 말합니다. 요가 수행의 시작과 끝을 밝혀 놓은 게 바로 아슈땅가인 셈이지요. 이 요가 수행의 첫걸음에 놓인 징검돌이 바로 아힝사입니다. 아힝사의 실천으로부터 요가의 여정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