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원책담 Jul 10. 2023

너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오늘따라 우리 부부는 늦잠을 자서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아들 방문이 열려 있어 방을 보니 아들이 없었다. 화장실에도 없어 아내에게 아들이 벌써 나갔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도 그제야 알고 깜짝 놀랐다. 아들은 평소 늦잠꾸러기여서 당연히 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외출했다니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며칠 전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는데 그 일이 오늘부터 시작이려니 했다. 아르바이트를 언제부터 하는지, 매일 하는지 아니면 일주일에 며칠만 하는지 등등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방학 때 대학교 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만 하니 이렇게 당황스럽다.
  이 아이는 자기 생활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 준다. 오늘 점심에 뭐 먹었냐고 물으면 맛있는 것을 먹었다고 대답한다. 나의 질문은 구체적인 메뉴와 그에 곁들인 생활을 묻고 싶었는데 대답이 이따위니 그다음 끌고 갈 대화거리가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무뚝뚝하고 건조한 아들을 보고 있으면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몇 번 지적해 보았지만 별로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입을 닫아, 차라리 우리 부부는 서로 알아낸 아이의 취향과 상태를 공유하며 퍼즐을 맞춘다. 아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 덕에 부부간 대화가 길어지고 깊어졌다.
  그렇다고 아들과 내가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밤 12시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나는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묻는다.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는데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일어나는 거야?”
  “공모주라는 것은 뭐야?”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이렇게 나에게 다가온다. 처음은 자기가 정한 주제로 이야기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대화가 이어간다. 차 한 잔도 없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야밤의 토크가 진행된다.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을 때가 많다. 오랜만에 아들과 대화가 반갑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제 자야겠다며 일어선다. 며칠 전 무뚝뚝한 아들로 인해 상처받았던 나의 마음이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회복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들과 나는 다시 서먹한 관계로 돌아선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와 이렇게 둘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와 나만의 대화는 서로 알려줄 것이 있거나 아버지가 나에게 꾸짖을 때뿐이었다. ‘용건만 간단히’라는 전화예절처럼 간단히 이야기하고 대화를 마무리한다. 은퇴하시고 나이가 드시면서 보다 다정해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버지랑 대화는 길지 않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빴고 고등학교 이후에는 내가 바빴다. 마주치는 날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와 식사와 대화는 결혼하고 나서 더 많았다. 나의 무뚝뚝한 아들은 야밤의 토크라도 하자고 다가왔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내가 무뚝뚝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고 어려워 다가가기 어려웠다.  요즘에는 부모님 댁에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뵐 때 가벼운 포옹을 하고 헤어진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난 네가 안아줄 때가 좋더라.”라고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흘리듯 말하셨지만 나에게 다가온 울림은 상당했다. 이렇게 감성적인 분이 아니신데 나이가 드시니 아버지도 변하셨구나. 며칠 전 아버지께서 전화 와서 네가 수요일에 쉬니 그때 강화도에 가자고 하셨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 뜻밖의 제안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화로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여쭙지 않았다. 강화도에 가서 직접 아버지께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냥 오랜만에 너랑 나들이를 하고 싶어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부자지간 만나 식사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아버지와 나 사이 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만 보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벽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냥 다가올 수 있다. 벽을 깬다면 보이는 사람만 깰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원래부터 다정한 분일 수 있다. 이제까지 가려져 다정한 부분을 볼 수 없었다. 내가 안아드림으로써 아버지와 나사이의 벽을 깨고 나서야 아버지의 다른 면이 보였다. 소원책담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폴딩 도어의 유리를 누군가 똑똑 두드린다. 돌아보니 아들이 커다란 백팩을 메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외출하려는 모양이다. 이 아이는 무뚝뚝하지 않다. 너의 아버지가 무뚝뚝한 면만 보고 있을 뿐.

매거진의 이전글 사과(謝過)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