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독서모임

느린 문학의 힘

by 소원책담



세계문학을 위주로 하는 문학산책 모임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묘사가 가득한 소설이 때로는 읽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런 작품만의 고유한 매력입니다. 『설국』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첫 문장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의 첫 문장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강렬한 장치입니다. 우리는 이 문장이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시각적·청각적 대비를 통해 독자를 순식간에 작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힘을 지녔다고 분석했습니다. 묘사의 경이로움이 서사의 불친절함을 압도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터널은 도쿄라는 현실 세계와 눈의 고장이라는 고립되고 비현실적인 세계의 경계로 기능합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눈 때문에 바닥이 하얗게 보인다는 표현은, 가와바타 문장의 감각적 정수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시마무라, ‘관조’라는 비겁함

주인공 시마무라는 철저한 ‘관조자’입니다. 그는 서양 무용을 연구하면서도 실제 공연은 보지 않은 채 책과 팸플릿에만 의존하고, 타인의 삶과 관계에 깊이 개입하는 일을 피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차 유리창이라는 매개를 통해 요코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러한 관조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나약함일 수도 있고, 삶의 본질적 허무를 간파한 이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관계를 맺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녀를 ‘관찰 대상’으로 남겨 둡니다. 이 거리감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고요하면서도 허무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고마코와 요코

작품 속 두 여성 인물인 고마코와 요코는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고마코는 열정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약혼자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게이샤가 되는 헌신적인 면모 역시 그녀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녀는 시마무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끝내 그의 세계에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반면 요코는 정적이고 차갑고, 어딘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녀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투명하고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시마무라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관계를 단순한 삼각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 관계는 연민, 동질감, 질투가 얽힌 복합적인 애증의 구조에 가깝습니다. 특히 마지막 화재 장면에서 고마코가 요코를 안고 나오는 모습은, 두 인물의 운명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순간으로 읽혔습니다.


헛수고 그리고 죽음

작품 속에서 시마무라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헛수고”입니다. 그는 고마코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일, 약혼자의 병원비를 위해 게이샤가 된 선택을 모두 ‘보답도 성과도 없는 헛수고’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온 마음을 다하는 고마코의 태도는,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결말부에서 요코가 화재 현장에서 추락하는 장면은, 죽음조차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집요함을 보여줍니다. 기차 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 위로 산의 등불이 겹쳐지는 장면은, 이 마지막 순간의 복선처럼 읽힙니다. 시마무라의 시선 속에서 요코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은하수가 몸 안으로 흘러드는’ 압도적인 풍경으로 치환됩니다. 이 장면은 중반부, 다다미 위에서 죽어가는 작은 곤충의 몸부림을 관찰하던 시선과도 겹칩니다. 결국 인생은 눈처럼 녹아 사라질 ‘헛수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순간에 몰두하는 삶의 헛수고는 설국의 풍경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느린 문학의 힘

『설국』은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 아닙니다. 서사는 듬성듬성 끊기고, 시간은 불친절하게 비약합니다. 그러나 주전자 소리에서 발소리를 연상하고, 눈 위의 붉은 색채 대비에 가슴 떨리는 이 작품의 ‘정적인 감각’은 독자에게 귀한 사색의 시간을 선물합니다.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과 의미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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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일시 : 2026. 1. 17(토) 오후 2시

참석인원 : 8명

소원책담 8번째 문학산책에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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