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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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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운 Jun 14. 2017

제주살이

20170604

제주에 내려온 지 2주가 지났다.  


나는 책방에서 일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일한다. 공평하게 일주일에 이틀씩, 그리고 나머지 3일은 쉰다.

2-2-3. 축구 포메이션처럼 균형이 맞는다. 해본 적 없던 일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 카드와 영수증을 내밀고, 봉투에 스티커를 붙이고, 책을 담는다. 손님들이 마실 차를 끓이며 휴지통이 꽉 차진 않았는지 점검한다. 구석에 놓인 오디오가 잠잠해지면 CD를 바꿔 올려놓고 재생버튼을 누른다. 이름을 모르는 외국 연주자의 베이스 소리가 좁은 선반 사이를 지난다.  


나는 책방에서 잔다. 작업실 한 켠을 차지한 소파는 밤이 되면 침대로 변한다. 2단으로 제껴 평평해진 자리에 등을 대고 눕는다. 밤의 제주는, 그리고 밤의 책방은 고요하다. 수백 명의 작가들에게 둘러싸인 셈이지만 누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다. 이따금씩 불빛을 찾아 날아든 파리가 웅웅거릴 뿐이다. 대개는 잡지 않고 내버려 둔다. 자연친화적이라거나 하는 점잖은 이유가 아니라, 곳곳에 숨어있을 파리들을 모두 찾아내어 처치하기에는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전등을 끄고 책과 엽서, 어둠이 엉킨 자리 가운데에서 잠이 든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내가 제주살이를 꿈꾼 건 군대에서부터였다. 글감이 떠올라도 기록해둘 방법이 없어 입안에서 문장을 외우던 때, 나는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원했다. 복학 전까지의 시간만큼은 내게 필요한 일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러니 제주도에 가겠다고. 도착해서 보니 카메라는 진작 셔터가 고장난 상태였다. 새 노트북이 생겼지만 글도 잘 쓰지 않는다. 말끔한 화면을 노려보다가 금세 딴청을 피우기 일쑤다. 하지만 조바심은 들지 않는다. 애초부터 정해진 기한 같은 건 없으니까. 어쩌면 글은 쓰는 게 아니라 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살고 싶어서 제주에 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작 나의 하루를 돌아보면 짧기만 하다. 일어나서 밥을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바깥의 갈대밭을 잠깐 쳐다보고 나면 다시 식사시간이다. 그렇게 일상은 또박또박 순서를 지켜서 찾아온다. 당김음이나 중간에 박자가 바뀌는 일은 없다. 천천히라는 말뜻보다 중요한 건 다음 차례에 올 음표를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너무 정직해서 심심할 정도의 연주지만, 한 음 한 음을 치면서 내가 만족할 수 있으면 되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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