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춥지 않아 좋고 눈이 오지 않아서 더욱 좋다. 어쩌다 눈이 오면 언덕과 비탈길이 많은 부산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우리 대학이 산에 있다 보니 조금만 눈이 와도 사고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더구나 내가 사는 곳은 언제나 높은 언덕이다 보니, 눈과 얼음에 익숙지 않은 나는 차가 종잇장같이 날리는 희한한 일을 겪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적이 많았다.
눈이 꼭 이렇게 심술만 부리는 것은 아니다. 온 세상이 일순간에 순백의 설국으로 변한 모습은, 고요하다 못해 엄숙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고 자연의 위력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특히 지난겨울처럼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게 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다름 아닌 꽃비와 꽃눈이다. 겨울에 내리는 눈과는 달리 색깔만큼이나 예쁘고 우아해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도 않고, 질척거리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더욱 반갑다.
달맞이언덕은 벚꽃으로 유명하다. 진해 경화역이나 여좌천만큼은 아니라도 충분히 볼만하다. 꽃이 만발한 휴일이면 아침 일찍 나갔다 오거나 저녁 늦게 나들이객들이 다 돌아간 후에야 나간다. 꽃 멀미는 황홀하지만, 사람 멀미는 참 피곤하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을 즐긴다. 조금 더 나아가면 환상적인 밤 벚꽃을 즐긴다. 그러나 내가 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즐기는 것은 벚꽃이 떨어지며 내리는 꽃비와 꽃눈이다. 바람을 따라서 내리는 꽃눈을 바라보면 그 황홀한 혼동과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몽롱함이 나를 취하게 만든다. 어떤 술이나 마약이 이렇게 취하게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삶이 갑자기 연분홍빛으로 물들고 내가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가끔 이런 환상과 도취가 없다면 삶이 얼마나 더 각박하고 삭막할까? 누구는 아직도 소녀 감성이나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래도 괜찮다. 가끔은 이렇게 환상과 몽롱함 속으로 빠져들어 취해보는 것도, 정신적 휴식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성과 채 바퀴 같은 궤도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신선하고 참신해서 좋다.
한 번씩 좁고 얄팍한 맨 정신으로 말똥말똥하게만 살기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신화를 읽고 판타지에 젖어보기도 하며 우리 삶에 더해져야 하고 복원되어야 할 무엇이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젖어든다. 그래서 삶도 꽃눈처럼 보드랍고 섬세하며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이 전하는 위로와 위안이 얼마나 큰지... 이런 아름다움과 위로가 우리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시와 음악이 우리를 더 아름다운 존재와 본질적 삶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 앞에서는 자연스레 언 가슴이 녹아나고 분노가 사그라지며 해묵은 상처도 털어버리게 된다. 그저 지금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게 된다.
정녕,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