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브랜드 상승, 지역의 소비·고용 연결 보여줘
경주, K-프리미엄을 MICE상품 전환할 전략 시급
레거시, 기억 아닌 ‘장소와 상품’으로 고정 필요
지역 MICE기업에도 기회줘야 실익·노하우 쌓여
“APEC경주 성공의 여운, 'MICE 르네상스'로 승화시키자”
2025년 가을, 천년 고도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막을 내렸다. 세계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는 21개 회원 경제체의 정상과 글로벌 기업 리더들이 한 도시에 모이는 장면은 언제나 상징적이다. 이러한 대형 국제행사는 화려한 무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의전과 보안, 교통과 숙박, 미디어와 시민 안내, 돌발상황 대응과 사후 정리까지,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시스템이 일사불란하게 맞물려야 한다.
그 ‘맞물림’이 가능하다는 신뢰는 통상 수도권의 경험과 인프라에 기대어 쌓여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방 도시인 경주가 그 총합을 무리없이 감당했다. 경주가 치러낸 건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라, 한국이 지역을 기반으로도 글로벌 의제와 비즈니스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증명이다. 이것은 관광도시 경주의 성취이자, 국가 MICE 운영모델이 한 단계 확장된 계기이기도 하다.
행사의 여운은 숫자에서도 읽힌다. 대한상공회의소와 딜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행사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약 7조4000억 원, 고용 유발 효과는 2만2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행사 전후 한 달가량인 10월 1일부터 11월 4일까지 경주를 찾은 외지인은 전년 동기 대비 22.8% 늘었고, 외국인 방문객도 35.6% 증가했다. 물론 이런 수치는 일정한 전제와 모델을 바탕으로 계산되며, 기간 설정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국가 브랜드 상승’이라는 추상적 수사가 도시의 소비와 고용이라는 실체로 연결될 수 있음을 경주가 보여줬다는 점이다.
APEC 2025의 성공 개최는 국가 MICE 운영모델이 한 단계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월 31일 경주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갈라만찬에서 건배 제의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MICE산업의 진정한 가치는 일회성 소비가 아닌 ‘반복 방문과 재유치’에서 비롯된다. 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MICE 참가자의 일반 관광객 대비 지출액은 평균 2.5배에 달하며, 회의 참가 후 해당 도시를 재방문하는 비율은 40%를 상회한다. 성공 개최라는 축포가 잦아드는 순간부터, 도시에는 더 어려운 과제가 남는다. 경주가 이번 성과를 일시적 ‘관광 특수’로 소진할 것인지, 아니면 지속가능한 MICE 목적지로서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할 것인지는 앞으로 2~3년의 후속 전략에 달려 있다.
MICE는 회의와 전시를 뜻하는 산업이지만, 본질은 ‘도시가 신뢰를 팔고 경험을 설계해 부가가치를 만드는 시장’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MICE산업을 ‘국가 경쟁력의 소프트 인프라’로 규정하며, 선진국일수록 MICE산업 육성을 국가 전략적 어젠다로 다루고 있다. 참가자 수가 많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인사가 다녀갔다고 산업이 커지는 것도 아니다. 국제행사를 산업으로 만들려면 방문객이 도시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얼마를 쓰는지, 다시 오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다음 유치의 설득력으로 환원되는지를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경주가 지금 맞닥뜨린 과제는 바로 그 관리의 단계다.
APEC 레거시 핵심은 장소와 콘텐츠…
레거시는 남는 게 아니라 ‘운영되는 것’
먼저 경주는 K-컬처가 만들어낸 ‘K-프리미엄’을 MICE상품으로 바꿔야 한다. 이제 한국은 ‘안전하고 편한 목적지’만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문화, 미식, 라이프스타일, 기술 경험이 결합된 ‘경험 자체에 프리미엄이 붙는 목적지’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외래관광객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한 외국인의 상당수가 한국 문화 콘텐츠를 통해 방문 동기를 형성했으며, 이들의 평균 체류 기간과 지출액은 일반 관광객보다 각각 1.3일, 28% 높았다. 글로벌 럭셔리 MICE 시장은 연평균 약 8%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문화적 진정성(Cultural Authenticity)’을 갖춘 목적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이야기와 세계유산, 야간 경관, 미식과 웰니스가 한 도시에 압축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세계적 자산은 MICE 참가자들에게 ‘비즈니스 미팅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차별화된 경쟁력이다. 여기에 APEC이라는 국제적 레퍼런스까지 더해졌다. 이 조합은 VIP와 C-Level을 겨냥한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기에 더없이 유리하다.
경주가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패키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경주만의 프리미엄을 표준화해 누구나 팔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정상들이 경험한 격식과 동선, 공간의 분위기를 기반으로 파인다이닝과 프라이빗 투어, 의전과 통역, 보안과 이동을 한 덩어리의 서비스로 설계해야 한다. 경주가 프리미엄 시장에 들어가려면, 프리미엄은 분위기가 아니라 서비스 품질과 가격표로 증명돼야 한다. 표준 매뉴얼과 응대 품질, 다국어 안내와 고객지원까지 갖춰질 때, 경주의 프리미엄은 ‘한 번의 행사’가 아니라 ‘반복 구매가 가능한 상품’이 된다.
APEC CEO 서밋이 열릴 경주화랑마을에 무대와 행사장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제공=SPEAENCE
정상회의에 앞선 10월 28일, APEC CEO 서밋에 참가한 각국 기업 관계자들이 만찬을 즐기며 비즈니스 미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SPEAENCE
다음으로, APEC의 레거시(유산)를 ‘기억’이 아닌 ‘장소와 상품’으로 고정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의의 주 무대였던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만찬이 열린 라한셀렉트, CEO 서밋이 개최된 경주화랑마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스토리텔링 자산이다. HICO 내 주요 회의실과 라운지를 ‘APEC Hall’로 공식 명명하고, 정상들이 이동했던 동선과 메뉴를 결합한 ‘APEC 리더스 루트(Leaders' Route)’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야 한다. 기업 인센티브 투어 참가자들이 정상들과 동일한 공간에서 같은 프로토콜을 체험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음 회의를 부르는 가장 확실한 레퍼런스가 된다.
APEC의 레거시는 추억이 아니라 장소와 콘텐츠로 남아야 한다. 대형 국제행사는 “그곳에서 실제로 열렸다”라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자산이다. MICE산업에서 레퍼런스(Reference)의 힘은 절대적이다. 글로벌 기업의 미팅 플래너들은 행사지 선정 시 해당 시설이 과거 어떤 수준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는지를 핵심 평가지표로 삼는다. APEC 정상회의라는 최상위 레퍼런스는 경주가 향후 10년간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자산이다. 2005년 부산이 APEC 이후 누리마루를 명소화해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MICE 도시로 도약했듯, 2017년 다낭이 APEC 이후 국제선 노선을 대폭 확충하며 세계적 휴양지로 거듭났듯, 경주 또한 이 공간들을 영구적인 비즈니스 관광 자원으로 남겨야 한다. 경주는 이 성공 모델을 벤치마킹하되, 천년 고도라는 차별화된 역사적 맥락을 더해 한층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레거시는 남는 것이 아니라 운영되는 것이다.
지역 중소업체에겐 지나치게 높은 입찰 진입장벽
서울 대형업체와 컨소시엄·성과공유 구조 만들어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역 MICE 생태계의 체력을 키우는 일이다. 대형 국제행사가 지역에서 열려도, 실질적 수익과 노하우가 수도권 대행사와 외부업체에 집중되는 구조가 반복되면 지역은 행사 때만 바쁜 파트너 플랫폼으로 남는다. 이는 지역 MICE 산업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 대형 발주처가 요구하는 실적 증빙, 보험, 재무 안정성 등의 진입장벽이 지역 중소업체에게 지나치게 높게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경주가 ‘MICE 르네상스’를 말하려면, 지역 업체들이 상시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스스로 상품을 만들고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울의 대형 PCO와 지역 업체를 단순히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성과를 공유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호주 멜버른컨벤션뷰로가 운영하는 ‘멜버른 파트너 프로그램(Melbourne Partner Program)’은 이러한 모듈화 전략의 성공 사례다. 지역 공급업체 200여 개사를 표준화된 서비스 카탈로그로 등록해 글로벌 미팅 플래너들이 원스톱으로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지역 업체들의 글로벌 행사 참여율을 크게 높였다. 의전, 수송, 투어, 공연, 통역, 케이터링 같은 서비스들을 모듈화해 지역 업체가 바로 제안서에 넣어 팔 수 있는 형태로 카탈로그화하는 것은 경주에도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지역 인력 파이프라인이 만들어져야 한다. 경주시와 경상북도는 MICE 스타트업 육성 펀드 조성, 지역 대학과 연계한 MICE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 그리고 중소 규모 국제회의 유치를 통한 실전 경험 축적 기회 제공 등 중장기적 생태계 구축에 나서야 한다. 교육과 실습이 정례화되고 숙련도가 쌓일 때, 도시는 ‘또 한 번의 유치’가 아니라 ‘상시 유치가 가능한 시스템’을 갖게 된다.
2026년, 경주 APEC은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국가 정상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이번 APEC에서 보여준 디지털 전환도 이제는 보여주기에서 효율적인 운영으로 이동해야 한다. AI 통역과 AI 휴먼, 자율주행 셔틀은 눈길을 끌었지만, 기술은 이벤트가 되면 비용으로 남고, 운영 모델이 되면 경쟁력이 된다. 특히 실시간 다국어 AI 통역 시스템은 21개국 정상과 수행원들의 원활한 소통을 지원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이러한 기술들을 등록부터 출입과 안내, 세션 운영과 네트워킹, 사후 분석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한국형 스마트 MICE 운영 모델’로 정착시켜야 한다.
글로벌 MICE 테크 시장은 2028년까지 연평균 약 10%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이 이 시장에서 ‘기술 공급국’이자 ‘운영 모델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이는 MICE산업의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 참가자가 느끼는 편의성은 곧 다음 행사 유치의 설득력이다. 작은 불편이 쌓이면 도시는 잊히고, 작은 편의가 축적되면 도시는 선택된다.
마지막으로, 국제행사의 기준은 더 높아지고 있다. 오늘날의 발주처는 행사 자체뿐 아니라 탄소 감축과 접근성, 안전과 위기대응, 지역 환류와 성과 측정까지 요구한다. 글로벌 MICE 시장에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 됐다. 주요 국제기구와 글로벌 기업들은 행사 개최지 선정 시 탄소 중립 로드맵, 지역사회 기여도, ESG 성과 등을 핵심 평가지표로 반영하고 있다. 경주가 글로벌 MICE 도시로 자리잡으려면, 그린 MICE 가이드라인과 안전·보안 매뉴얼, 그리고 무엇보다 성과를 측정하고 개선하는 지표 체계를 상설화해야 한다. 한 번의 성공은 사라지지만, 측정 가능한 성과와 개선의 루프는 다음을 만든다.
경주 APEC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계가 주목한 무대를 경주는 이미 확보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무대를 일회성 축제의 장이 아니라, 다음 회의를 낳는 지속가능한 산업의 기반으로 바꾸는 실행력이다. 천년의 유산 위에 첨단 기술과 상생의 지혜를 더해 경주가 ‘관광도시’의 이름을 넘어 ‘국제 비즈니스 관광도시’로 도약한다면, 그것은 경주만의 성공이 아니라 지역 기반 국가 경쟁력의 확장이라는 더 큰 성취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MICE 르네상스’의 진정한 의미다.
윤영혜 한국마이스관광학회 정책포럼위원장·동덕여대 교수
MICE기획·운영, 인적자원관리, 지속가능MICE 등 컨벤션전시경영 분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컨벤션, 관광, 전시 등 MICE산업 전반을 넘나들며 ‘지역특화컨벤션 참가 만족이 효과 인식과 지지도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지속가능발전목표(UNSDGs) 달성을 위한 경기지역특화관광 및 MICE 발전모델 개발연구’의 연구책임을 맡았다. 문체부 관광분과 R&D 과제기획 위원, 인천 IFEZ 발전자문위원을 지내고 있다.
12월 17일 이코노마이스에 실린 기고문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