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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드림 May 08. 2023

추워와 추억 사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이전 일본인 룸메이트와 기숙사를 같이 썼을 때의 일이다.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로 인기가 많았던 그녀는 일본인 남자는 멋이 없다며 한국인만 사귀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는데도 열정적이었으며 나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 떼쓰며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한국어 문장을 물어보곤 했었다. 


고국을 떠나 둘 다 사무치게 외로운 날이 지속될 때라 서로에게 참으로 많이 기대기도 하고 일상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녀에게 한국어를 알려줄 때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당연하게 배운 모국어 하나로 이렇게 대단해질 수 있구나'라는 우쭐함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추억'이란 단어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미라이, '추억'이란 단어 혹시 알아?"


한국어 초급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안다는 듯 말했다. 

"응, 언니 알아요. 추워! 콜드라는 뜻이잖아. 추워 추워."


그녀의 귀여운 말투에 빵 터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억이란 단어는 초급에서는 익힐 수 없는 단어였다. 추워에서 벗어나 추억을 이야기하기까지는 추억이 쌓이는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몇 달이 지나 그녀도 추워라는 초급단어에서 벗어나 '추억'은 memories, reminiscece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옛 추억을 잊지 못하는 준세이 


10년 전 대학에서 아오이를 만나 연인이 되었으나 집안의 반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오해하고 헤어진 뒤 피렌체에서 고미술품 복원사가 되기 위해 떠난 준세이.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미술적 재능을 살리고자 수습생부터 시작해 복원사로 일하는 중이다. 여자친구가 있지만 그녀와 있으면서도 전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그다. 


수련 중인 준세이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소식을 듣게 된다. 조반나 선생님의 추천으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치골리라는 작품의 복원을 맡게 되지만, 잊지 못하는 옛 연인을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는 준세이. 


그녀에겐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마음을 확인 한 채 다시 피렌치로 돌아온다. 작업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준세이는 아오이와의 추억이 가득한 일본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몰랐던 아오이와의 비밀과 오해를 풀게 된 준세이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지막 편지를 전하며 오래전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오르게 된다. 연인들의 성지인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서른 살 생일에 함께 가기로 한 아름다웠던 두 연인, 그들은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멀어진 간격만큼 마음도 멀어진 옛 연인 © 영화 배급, 하준사
끝까지 냉정했던 너에게 난 뭐라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가슴속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 난 과거를 되새기지도 말고 미래에 기대하지도 말고 지금을 살아가야만 해. 아오이, 네 고독한 눈동자 속에서 다시 한번 더 나를 찾을 수 있다면 그때, 나는.. 너를..
<냉정과 열정사이> 준세이 대사



추억에 잠긴다는 건? 


'추워'는 말 그대로 지금 내 손이 내 발이 내 몸이 춥다는 뜻으로 현재의 상태, 내 감각에 초점을 둔다. 그에 비해 '추억'은 과거의 기억에 갇혀 누군가와의 사랑했던 순간을 잊지 못하며, 그 시절의 나를 기억 속에 가둬두는 자발적인 행각이다. 


일어로 '추억에 잠기다'는 뜻으로 追憶にふける 쓴다. 추억을 뜻하는 追憶과 더불어 '빠지다/골똘히 생각한다'라는 뜻의 동사 にふける를 쓴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be lost in memories'기억 속에서 길을 잃다, 즉, 기억에 갇힌다'는 뜻이다. 기억이라는 나만의 저장창고에 자신을 가두는 행동이다. 


준세이도 과거의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해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1997년 속 자기 모습, 행복했던 우리의 모습을 잊지 못하며 갇혀 살고 있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현실, 매몰차게 대했던 아오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오해했던 과거 자기 모습을 지우려 애쓰면서 말이다. 


어렸을 때의 내 모습, 돌아갈 수 없지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청춘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추억'을 떠올리면서 '추워'가 생각나는 것도 어쩌면 룸메이트와의 따스했던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은 내 모습이 아닐까? 


사소한 이야기에도 재미나게 웃고, 한국어를 알려주며 왠지 내가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찰나, 일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추워와 추억의 공간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오늘은 왠지 그 시절의 나를 끄집어내 추억에 갇혀, 기억 속에서 길을 잃고 싶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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