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3화. 미스터 계장들
2011년 12월 22일 김헌기는 경찰청(이하 본청) 지능범죄 수사과장이 됐다. 직속 계장이 보고했다.
“조현오 청장님께서 그 의경 사망 사건에 대해서 독회를 하신답니다.”
2011년 7월 말 의정부 동두천에서 의경이 사람을 구하려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다. 그 후로 이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가 진행됐다. 경찰청장이 배석한 상태에서 주무담당과장이 단상에 올라가 사건을 보고한다. 그 후에 쟁점을 두고 서로 토론하는 것을 독회라고 한다. 김헌기는 본청 경험이 없어 ‘독회’ 뜻을 몰랐다. 하지만 담당 계장은 김헌기 과장이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료를 챙겨주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옆에 앉은 강신명 수사국장이 발표하라며 김헌기를 툭툭 쳤다. 당연히 매끄럽게 될 리가 없었다. 조현오 청장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장 내려가.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김헌기는 본청 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만약 경찰종합학교장을 했던 김석기가 2009년 경찰청장이 됐다면 본청 경험을 일찍,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석기는 2009년 용산참사로 2월 10일 물러났다. 김석기는 경찰청장 내정자 기간 경찰 인사를 단행했다. 그때 조현오를 치안정감으로 승진시켜 경기지방경찰청장에 내정한다.
이 둘은 이택순 청장이 엄청 괴롭혔던 대상이다. 김석기는 본청에서 이택순 청장을 매일 마주하는 조현오를 위로하면서 수사권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몇 가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수사국은 수사국장(치안감) 아래에 새롭게 수사기획관(경무관)을 뒀다. 그 밑에 지능범죄수사대와 범죄정보과를 신설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당할 수사구조개혁팀은 경무관이 단장인 수사구조개혁단으로 크게 몸집을 키웠다.
조현오 청장 시절에는 연줄보다 해당 분야에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는 인사 흐름이 있었다. 강신명 수사국장은 지능범죄 수사과장에 김헌기를 추천했다. 김헌기는 인천지방청 수사 2계장 시절 안상수 굴비사건 수사로 각인됐다.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청장 소신이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당시 민갑룡 기획조정담당관은 조 청장이 가장 대접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도승지 역할이었고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대통령령을 정할 때 검찰과 실무협상에 나가기도 했다.
조현오 청장은 능력이 탁월하면 수직과 수평 질서를 흔들어도 중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운하다. 조 청장이 민정수석 반대를 무릅쓰고 승진시켜 2011년 말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내정했다. 믿고 맡기면 일절 간섭하지 않고 외풍을 차단해주는 게 조현오 청장 방식이다. 수사국에 속한 지능범죄수사과(현 수사과), 강력범죄수사과(현 형사과), 수사구조개혁단 등 수사부서들은 모두 본청 5층에 있다.
경찰청 내에는 계장급 경정이 150여 명이 근무하고 총경 승진 할당량도 경찰청이 가장 많다. 수사국은 매년 계장 두 명 정도가 총경 승진을 한다. 승진에 유리한 보직들이 있다. 계장이 총경으로 승진 후 자리가 비면 수평이동을 할 우선권은 주로 같은 국이나 과 계장에게 주어진다. 당시 수사구조개혁단에는 김헌기가 예전에 함께 근무를 했던 W가 있었다. 김헌기 수사과장은 사무실 복도에서 W를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랑 같이 근무하는 계장으로 와야 해."
"네, 알겠습니다."
2013년은 이성한 경찰청장 시절이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게시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급기야 민주당 쪽에서 국정원 직원이 작업하는 오피스텔을 급습하고 경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선거 후 김헌기 수사과장도 이 사건으로 국회로 불러 다녔다. 직속 계장들은 따라다니며 뒤에 앉아 지켜봤다. 그 당시 계장 눈에 비친 김헌기는 어땠을까? 한 계장은 김헌기 과장에 대한 인상 깊은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경찰 수사는 정신없이 진행됐다. 김헌기 과장은 회의 때 검찰에서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수사할 시간(2개월)을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법 공소시효는 6개월이다. 검찰은 사건 발생 6개월 내에 공소제기를 해야 한다.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수사에 집중하다 보면 모를 수가 있어요. 지혜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요?”
박근혜 정부는 불량식품 근절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정부시책에 경찰은 어느 정도 업무성과를 내야 했다. 불량식품 관련 법규는 식품위생법 위반 특별법이다. 특별법 업무 소관은 지능과가 맡는다.
본청 계장들 역할은 무엇일까?
계장들은 여러 가지 총괄 계획서를 작성한다. 계획서에는 단속 배경과 대상, 방법, 인력, 적용 법 조항 등이 들어간다. 불량식품 단속은 경찰도 생소해 소집교육도 시키고 매뉴얼도 제공한다. 이후 단속 사항이 올라오면 수사 지도를 한다. 성과를 언론에 홍보하는 것까지 본청이 관리한다.
동물 사료용 폐닭, 폐기용 돼지 부산물 등이 시중에 유통되다 경찰 수사에 적발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업무를 관리했던 담당 직원은 당시에 순대와 통닭을 도저히 먹지 못했다고 했다. 원래 식품사범은 구청 소관업무다. 이게 경찰업무로 들어오자 일선 경찰은 불만을 드러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작용도 나타났다.
하루는 경찰청에 토종닭협회 전화가 걸려왔다. 야산에 닭을 삼삼오오 키우는데 그게 무허가라 경찰 단속을 받은 모양이다.
“경찰 때문에 서민경제가 다 죽는다.”
토종닭협회는 강경하게 나왔다. 경찰청이 있는 서대문 사거리에 2000명이 모여 생존권 투쟁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경찰청 앞에서 닭들이 파드닥거리며 휘젓고 다닐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 언론도 경찰이 무분별하게 단속한다는 기사를 내고 있었다.
본청에서는 저인망식 수사 자제를 지시했지만 영세업자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처럼 실무에서 혼선이 있을 때 김헌기는 명확히 기준을 잡아준다. 함께 일했던 한 계장은 풍부한 수사업무 경험에서 생긴 감각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란법 매뉴얼을 만들 때 일화도 들려줬다.
당시 경찰 대응 방향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김영란법을 위반했다며 112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김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112 신고에 나가면 안 되는 거지.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이게...”
김헌기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란법의 약점은 국민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법에 규정해버린 것이다. 선물부터 관혼상제.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그게 부패방지를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법에 의존하는 사회가 될수록 112 출동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또한 이건 현장에서 증거를 잡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도 쉽지 않다.”
김헌기는 김영란법 신고 관련 대응 방향은 서면 신고를 받는 것으로 정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경찰은 112 신고에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일선 서에 부담을 줄이고 명확한 지침을 내리고자 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조현오 청장이 물러나면서 쫒겨났던 황운하는 그 해 여름, 경무관 6년 차에 기적같이 승진했다. 반면 김헌기는 원하던 보직과 멀어졌다 수사연수원장으로 첫 부임하고 나서도 한동안 맥이 빠지고 마음이 우울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고교 동창이라고 소개했다. 전화한 용건을 털어놨다.
“이웃집은 강아지 3마리를 키운다. 강아지는 다리가 짧고 험상궂게 생겼다. 자기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는데 충격을 받아 출근도 못했다.”
이 대목에서 그 고교 동창은 강아지 사진을 김헌기에게 보냈다.
납작한 얼굴을 가진 새까만 강아지였다. 김헌기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교 동창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112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와서는 이건 경찰에서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돌아갔다. 부인이 무서워하고 스트레스받는데 어떻게 경찰이 안 해주냐”
김헌기는 가슴에서 열불이 확 올라왔다. 겨우 진정하고 공동주택에서 애완견 키우는 건은 경찰이 처리할 수 없다고 답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꼼꼼하고 깔끔한 김헌기 방식이 아니었다. 김헌기는 인터넷을 검색해 고교 동창에게 오피스텔 관리회사 공동주택 관리규약과 대응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내용을 문자로 보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또 바뀌었다. 2018년 민갑룡은 새로운 경찰청장이 됐다. 조국 민정수석이 추천했다고 한다. 조국은 이미 2005년 민갑룡 경정이 수사구조개혁팀 근무할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알았던 사이다. 민갑룡은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수사나 경비와 아닌 기획 계통으로 근무했고 지휘 경험이 없어 꼬투리 잡힐 게 그다지 없었다. 민갑룡 경찰청장 후보자는 무난하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경찰청은 연말이 되면 승진인사 발표한다. 경무관은 승진이 안 되면 6년째 그만둬야 한다. 2018년 송무빈 경무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아직 기간이 남았는데도 사의를 표명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그 해를 기회로 여기고 은근히 기대했을 테다. 서로 가족처럼 생각해도 결국 한 명이라도 옷을 벗고 나가기를 바란다. 늘 승자는 소수다.
어느 날 김헌기는 전화를 받는다. 아끼던 본청 직원 J가 입원했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본청에서 4년 동안 지능범죄 수사과장(현 수사과장),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 수사기획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계장을 경험했다. 김헌기가 수사과장일 때 계장으로 오라 했던 W는 형사과 계장으로 도망갔지만 이듬해 김헌기가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W는 뚝심이 있고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면이 있다. 결국 W는 형사과에서 총경 승진을 했다.
반면 J는 우직하게 일만 했다. 병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다. 그런데 입원하자니 인사를 앞두고 있어 주위 시선이 걸린 모양이었다. 승진에서 떨어지자 병이 더욱 깊어졌고 병원으로 실려 오게 됐다. 김헌기가 급히 병원을 찾아갔다. 병상에 누워 수혈하는 J를 보고 김헌기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둘이 껴안고 엉엉 울었다.
“일만 시키고 내팽개치니까 조직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