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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형 Jul 30. 2020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2화 심규상 네트워킹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는 대전과 충남 지역을 담당한다. 심 기자가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와 삼성물산 소속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원유는 태안 해역으로 유출됐다. 신문웅 <태안신문> 편집국장은 해안에서 검은 기름이 육지를 삼킬 듯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는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규상 기자에게 취재팀장을 맡겼다. 심규상은 대전에서 태안으로 가야 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는 2009년 개통됐다. 2007년 당시 대전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였다. 심규상 기자는 사건이 발생하고 4개월 동안 태안에 세 번 갔다. 처음은 자원봉사자, 두 번째는 취재 중반 점검, 마지막은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생산 수는 <오마이뉴스>가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규상 기자는 서산, 태안, 당진, 보령, 홍성 등에 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활용했다.

각 지역 시민기자는 취재 요청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지만 애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결국 시간과 비용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심 기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그에게 '네트워킹'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이 다섯 단어만 기억하라



심 기자는 자기 삶을 풀어 네트워킹을 5개 단어로 정의했다. 운명, 접속, 관계, 긍정, 공명 등이다. 그는 삶 속에서 네트워킹을 구체화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운명

심규상 기자는 충북 영동 두메산골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교장에게 사정해 떠넘기다시피 입학을 밀어붙였다. 

중·고등학교는 전라북도 설천면으로 다녔는데 텃새에 시달리곤 했다. 가난한 부모는 담배 수확을 늘려 자식 학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심규상 기자는 1986년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입학한다. 가난과 학교 생활 모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② 접속

1986년은 양담배를 처음 수입한 해다. 대학생들은 '양담배 수입 개방 저지' 데모를 했다. 부모가 담배를 재배하는 심규상에게 양담배 문제는 곧 학비 문제였다. 데모에 참석한 심규상은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담배 농사 몇 단 지어요?"

그 학생 집은 담배를 키우지 않았다. 담배 농가를 대신해 싸운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심규상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데모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심규상은 학생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급기야 교도소까지 가게 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만든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민자당 중앙당을 점거한 대학생 중에는 심규상도 있었다. 재판 당일 아버지가 서울구치소를 찾아왔다.

"오늘 판사님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해라. 안 그러면 호적에서 빼낸다."

그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판사에게 대들다가 사지가 들려나가는 막내아들을 봤다. 심규상은 반성문을 쓰지 않아 안동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만에 만기 출소했다. 심규상은 복역 기간 매주 한 통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적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여름, 부모님은 출소하는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심규상은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외면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밀었다. 상에는 수육 한 접시가 수북하게 올라 있었다. 무심히 대문 쪽을 바라본 심규상은 조금 전까지 뛰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개를 잡았던 것이다. 심규상은 눈물을 삼키면서 수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아들을 이해했다. 심규상 기자는 '접속'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심규상은 재야단체에서 활동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전교조 충남지부,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등 30여 개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대전충남연합 조직부장을 맡는다. 몇 년 뒤 '접속'은 충남 지역신문으로 이어진다.




③ 관계

충청남도에 두루 뻗은 차령산맥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런 지형은 마을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군은 불가사리 모양 지형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지역신문은 마을 소식을 접하는 매개체로 유용했다. 이 지역 신문은 대부분 <한겨레> 창간 이후에 생겼다.



<당진시대> <태안신문> <홍성신문> <뉴스서천> <예산무한정보> <충남시사> 등 형편이 제각각인 충남지역 21개 지역신문들은 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1998년 대전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한다. 

대전은 도청·교육청·도의회 등 충남지역 주요 행정기관이 밀집된 곳이다. 하지만 당진, 서천, 태안 등에 있는 지역신문사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전으로 취재를 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버거웠다. 

협회는 원하는 취재를 대전에 거주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협회는 이 같은 고민을 지역 시민단체와 공유하며 적임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이가 심규상이었다.

심규상은 시민단체 업무가 끝나는 오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작성한 기사는 21개 신문사에 팩스로 전송했다. 충남도청에 대한 비판 기사는 월요일에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먼저 게재됐다. 그런데 같은 기사가 협회에 소속된 신문에 게재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각자 신문 발행주기에 따라 한 번 출고된 기사는 길면 2개월 뒤에도 게재되곤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비판 기사가 한 번 게재되기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규상이 출고한 기사 대부분은 다른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도지사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다거나, 상급기관이 도청에 지적한 문제점 등이 심규상이 주로 다룬 소재였다.

심규상은 기사 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단체에서 내는 보도자료를 기사로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선언하며 지난 2000년 출범한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활동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오마이뉴스>는 성장세를 탔다. 이때 대전참여연대를 비롯한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연합뉴스>가 초창기 했던 것처럼 <오마이뉴스> 안에 '지역판'을 넣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대전충남' 카테고리가 생긴다. 2004년 심규상은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기자를 제안받는다.

네트워킹이 없었다면 지역판도 없었다



심규상 혼자 대전, 충남을 모두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규상은 시작부터 네트워킹을 짜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취재와 기사 작성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하게 한다. 

지역신문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중복 게재를 허용하는 <오마이뉴스> 정책은 이럴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규상은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풀뿌리 지역신문 기자들과 성심성의껏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연락 체계'를 가동한다.

시·군별로 1·2연락처를 정하고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부탁하는 형식이다. 1연락처가 사건을 챙길 수 없으면 제2연락처에게 전화한다. 취재 내용은 곧 정보가 됐고 시스템은 자리매김했다.




2004년 1월 27일 MBC 은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방영한다. 사회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 <뉴스서천> 대표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대표인 양수철에게 한 가지 제보가 들어온다. 충남 예산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가 썼다는 내용이었다.

1967년 건립한 충의사 본전에는 윤봉길 의사 영정이 봉안돼 있다. 현판은 박정희가 윤 의사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에 내걸었다. 양수철은 2005년 3월 1일 새벽, 박정희가 쓴 현판을 직접 철거하기 위해 충의사로 갔다. 그러면서 심규상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심규상은 현장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바로 예산지역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맡겼다. 그는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이었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친필 더 이상은 못 참아" 삼일절에 세 조각 난 충의사 현판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양수철 씨는 실형 6개 월을 선고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던 <뉴스서천>에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욕설이 쏟아졌다. 

반면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예산군청 홈페이지는 각각 복원과 교체를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들끓었다. 한 달여 후 예산군은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복원한 현판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걸었다. 

이 사건을 통해 충남 지역신문은 <오마이뉴스>와 기사 네트워킹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리면 댓글을 통해 반응을 보고 다시 보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객관성을 더욱 갖췄다. 이러한 협업은 2년 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빛을 발했다. 

이런 네트워킹 구성은 <오마이뉴스> 본사가 요구한 게 아니었다. 심규상은 언론으로 지역을 바꾸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규상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즉 '긍정'과 '공명'이 네트워킹에서 핵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3화는 최병성 네트워킹입니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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