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촌에서 쪼끄만 신문사 다닌다고 서울 사람들이 내를 무시하는데…"
2008년 초 그가 처음 나에게 한 말이다. 겨울 광화문 근처, 누가 문을 열면 바깥 한기가 안으로 들이닥치는 술집이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관련 각종 세미나로 서울에 온다고 했다. 얼굴은 검었고 광대뼈 아래로 살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를 잡은 손마디는 투박했다. 그는 자신이 서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일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서울 사람들이 그에게 준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이름은 김주완. 그는 1964년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학교에서 용모 검사를 한다기에 하얘지기 위해서 씻다가 살결이 상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은 부산에서 보냈다. 1979년 고등학교 시절은 팝송에 빠져 지냈다. 긴 파마머리가 찰랑거리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직접 그려 벽에 붙여두었다. 부산 MBC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 경품도 종종 받았다.
1983년 김주완은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진주는 서부경남 중심지로 남강이 도시를 관통하여 흐른다.
진주는 경남을 대표하는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경상대를 비롯해 연암공전, 진주교대, 진주농업전문대, 진주전문대 등이 있었다. 규모는 경상대가 가장 컸고, 그만큼 운동권 학생도 많았다.
김주완도 집회에 항상 참여했다. 당시 학교 안에서는 운동권 학생과 비운동권 학생들 사이 갈등이 빈번했다. 비운동권 학생 중에는 운동권 학생을 견제하려고 폭력서클을 조직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회가 벌어질 때면 교내로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사수대가 가장 앞줄에 섰다. 전남대 '오월대', 조선대 '녹두대' 등 학교마다 사수대에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경상대는 인근에 지리산이 있어서 '지리산 결사대'라고 지었다.
한편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살해됐다. 그리고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분신이 잇달았다. 노태우 정권은 궁지로 몰렸다. 학생운동의 기세를 꺾을 계기가 필요했다. 1991년 10월 10일 '지리산 결사대' 사건이 적당한 기회가 됐다.
이날은 진주전문대학(현 한국국제대) 학생회장 선거 날이었다. 진주·충무지역 총학생회협의회는 이 학교 운동권 후보의 요청으로 부정선거 및 선거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경상대 학생 40여 명을 진주전문대로 보냈다. 개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의실에 대기 중이던 학생들은 패배가 확실해진 비운동권 측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 폭행당했다.
하지만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서 발표했다. 비운동권에게 습격당한 경상대 학생들을 전대협의 사주를 받고 결성된 극렬운동권으로 조작해 언론에 발표했다. 지역 언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이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관련기사: '지리산 결사대사건' 재조사 필요하다)
이 사건으로 학생 19명이 기소됐다. 폭력 및 집시법 위반 혐의였다. 학생들은 부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실상은 <한겨레>와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창간 초기였던 <한겨레>는 여전히 유통망이 약했다. 김주완도 자신이 근무하는 지역신문에 기사를 썼지만 사건 진상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통 파워를 체감한다. 그리고 고민 끝에 마산에 있는 지역 일간지 수습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중앙 언론의 '특종 도둑질'에 네트워킹으로 맞서다
김주완이 지역일간지 기자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관련 보도다. 훈 할머니는 1997년까지 캄보디아에 살았는데 <한국일보>가 초청해 고향과 혈육 찾기에 나섰다.
이 과정에 대부분 언론이 따라붙었다. 한국어를 잊은 훈 할머니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는 '진동'이 있었다. 김주완은 훈 할머니가 말한 '진동'을 마산 진동으로 확신하고 집중 취재했다. 옥편과 1리터짜리 환타를 들고 면사무소 호적등본 보관 창고에 앉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인근 동네를 돌면서 노인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수소문했다.
1997년 6월 18일 김주완이 쓴 기사는 "훈 할머니 가족 찾았다"라는 제목으로 1면에 게재됐다. 그런데 그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보도에서 보인 중앙매체들의 모습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신들이 취재한 것처럼 말하더라는 것이다.
중앙에서 당한 무시는 김주완을 화나게 했다. 그 분노는 콘텐츠 생산은 물론 콘텐츠 유통까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김주완은 2008년 봄이 되면서 바빠졌다. 블로그를 시작했다며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랑도 많아졌다. 그가 쓴 글은 다음 베스트 뉴스 첫 화면에 노출됐다.
김주완은 블로그라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 도구를 발견했고 더불어 이를 유통하는 전략에 대한 감각도 생겼다. 김주완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서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쓴 글은 이미 위력을 발휘했다. 소위 시사 분야 '파워 블로거'가 된 것이다.
거대 언론사들이 정보를 독점했던 때와 견주면 1인 미디어 등장 이후 공론장에 다양한 목소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사회적 의제 설정 기능을 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의제 설정은 이슈를 선택하고 거르는 작업을 거쳐 늘 주목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주목을 받을 통로를 만드는 것, 그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조직화 작업이다.
김주완은 '갱상도 블로거'를 조직해 인터넷에서 지역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는 어떻게 '갱상도 블로거' 모임을 운영했을까. 그는 먼저 가까운 지인에게 권유하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 제보하는 것보다 블로그 활동이 훨씬 파급력이 좋다고 선전했다. 듣는 사람이 귀찮게 여길 정도였다.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함께 했던 박만순도 그중 한 명이다. 김주완은 기사를 쓰게 하고 출고된 기사를 다듬고 제목도 뽑아줬다. 박만순이 쓴 "한국에서 하나뿐인 경찰관 공덕비"라는 기사 제목도 김주완 작품이었다. 김주완은 박만순에게 '다음 블로거 뉴스' 머리에 노출된 것을 보게 하면서 위력을 느끼도록 했다.
김주완을 시작으로 <충청투데이> 홍미애, <중부매일> 김정미 등이 블로거 조직화에 열을 올렸다.
경남지역 블로거 모임인 '갱상도 블로그'와 충남 블로거 모임인 '따블뉴스' 등이 이런 고민을 통해 만들어졌다. 특히 김정미 기자가 지역에 쏟아부은 노력은 헌신적이었다. 청주 <중부매일> 기자인 김정미는 2009년 '충청도 블로그'라는 메타블로그를 구축하면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 강의를 진행했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충청투데이> 홍미애 기자 영향이었다.
2012년 말까지 김정미 기자에게 강의를 들은 수강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인 김용직도 교육을 통해 SNS 가능성을 알게 됐다.
SNS 네트워킹, 파업현장에도 활기를
이명박 정부 등장은 금속노조 전체판 정리를 예고했다. 2009년 8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옥쇄파업이 경찰에 진압되면서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고,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이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에서는 여성 기숙사에까지 사측이 고용한 용역이 투입돼 부분 파업에 돌입한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탄압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달 후, 5월 18일 유성기업 사태가 벌어졌다. "밤에는 잠 좀 자자"며 주야 맞교대를 주간연속 2교대제(8시간 근무)로 바꾸자는 게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였다. 이날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사측은 용역을 고용해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고 폭력을 행사했다.
직장폐쇄 이후 들어온 용역을 몰아내고 조합원이 다시 공장을 점거한 게 19일이었다. 이날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자동차의 총괄이사가 공장 안에 있는 차를 꺼내 달라며 키를 건넨다. 키를 받은 조합원은 그의 자동차 조수석에 있는 노란 봉투를 발견한다.
봉투에는 40페이지에 이르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있었다. 불법파업 유도 후 직장폐쇄 그리고 용역 동원, 공장 봉쇄와 폭력 유발로 공권력 투입, 결국은 노조 파괴까지 이르는 내용이었다. 조합원은 이 모든 내용을 캠코더에 담았다. 노조는 또 용역 차량도 발견했다. 차량 안에는 뇌물 리스트가 적힌 수첩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30일 KBS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유성기업 사태를 거론하며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근로자들의 불법파업"이라고 못 박았다. 거대 언론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김용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은 블로그에 "유성기업 용역깡패 동원 노조원 13명 차로 밀어붙여", "유성기업 사태의 배후 현대자동차(?)", "유성기업이 불법파업이라 공권력을 투입한다고?" 같은 글을 올렸다. 그가 쓴 글은 <중부매일> 지면에 실렸고, 트위터로 끊임없이 리트윗 됐다. 김용직을 자신의 '리스트'에 올리는 트위터 사용자들이 많아졌다. 유성기업 투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김용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훗날 유성기업 조합원 500명은 직장폐쇄로 인근 논밭 하우스 안에서 살았다. 식사 반찬은 고추장과 김치가 전부였다. 조합원들은 후식으로 달달한 커피가 먹고 싶다는 넋두리를 하곤 했다. 김용직은 SNS를 통해 커피믹스를 후원받는 방법을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시도한다.
일주일이 지나자 하우스에 택배 차량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커피를 비롯해 생수, 쌀, 감자 같은 식재료가 쌓였다. 유성기업 조합원은 SNS 위력을 체감하게 된다.
유성기업 조합원들은 대구KEC, 경주 발레오만도 같은 기업의 노조원들이 자신들처럼 SNS를 활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경주 발레오만도 조합원에게 왜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역에서 잘 안 보는 매체"라고 답했다. 물론 이들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항MBC처럼 평소 익숙한 매체에만 한정됐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블로거는 2011년 7월 창원시가 개최한 전국 파워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했다. 당시 창원시는 SNS로 간담회를 생중계했다. 이 대구 블로거는 박완수 창원시장은 만나봤지만 대구시장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역 정치색으로 따지면 대구와 다를 바 없는 경남에서 이 같은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한 부산지역 신문사 기자가 경남에 발령을 받은 첫날 창원상공회의소를 찾았다. 창원상공회의소에서 그는 60대 대의원들이 행사 기획을 하면서 K-POP 가수 초청을 고민하는 모습을 본다.
"큰 기업이나 공단이 드문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창원에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60대가 행사를 기획해도 젊은 사람 수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 봐요."
창원은 대구와 달리 공장과 기업이 밀집된 지역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 층이 인구 구성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블로그를 비롯한 SNS는 누가 할까. 제주를 사례로 살펴보자. 제주는 자연 풍광과 올레길 열풍으로 젊은 층 유입이 늘어나는 곳이다. 제주에서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주민이다. 제주 토박이들은 이미 연결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SNS를 활용할 이유가 별로 없다.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경북 포항에 출마한 새누리당 후보 김형태가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에도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새누리당 강세 지역이라는 설명만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한겨레> 기사 "새누리 김형태 후보 제수씨 성폭행 시도 파문…'성누리 끝판왕'"이 트위터를 통해 끝없이 확산되며 김형태 낙선을 예고했다. 하지만 김 후보는 당선됐다.
포항시민 대부분은 4·11 총선이 끝나고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이 불거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포항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기자는 시민들이 정보를 접할 시간이 촉박했다고 지적했다. 성추문 의혹이 제기된 것은 총선 3일 전이었다. 이날 김형태 후보의 제수인 최아무개 씨가 포항에 있는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대구·경북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매일신문>을 비롯한 언론사들과 포항MBC를 포함한 방송사들이 참석했다.
다음날 지역언론이 이 소식을 전했지만, 포항은 수도권과 달리 SNS 영향력이 약했다. 정보가 퍼지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김형태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에는 그 지역구 유권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도배됐다.
이와 같은 편견 어린 중앙발 시각은 지역 주민에 대한 경멸과 무시로 이어진다. 즉, 네트워킹을 한정 짓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울 지식인들은 교양과 학식이 넘쳤다. 사회 양극화, 노동자 문제, 경제민주화, 복지·교육 등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더 진보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울 밖 세상에 대한 생각은 비슷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땅 끝까지 가는 좁은 땅덩어리를 가졌다."
"우리나라는 어디나 마트와 백화점이 소비문화의 중심이다."
"어디든지 아파트라는 거주문화가 비슷하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과 지역담론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방기자들은 사이비이며 지역 토호다."
이러한 서울 중심의 시각은 전국으로 퍼진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 스스로 알 길은 없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길을 따라서 전국을 떠나보기로 한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